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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베를린에서 베이징까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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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72년 전인 1936년 8월 9일 밤 11시. 당시 서울(경성)엔 비가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7750㎞ 떨어진 독일 베를린에서는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해 뛰고 있었다. 당시엔 인터넷은 물론 텔레비전 생중계도 없었지만 그들의 역주하는 실황은 NHK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올림픽 실황중계 방송이 하루 두 번(오후 6시30분, 오후 11시), 한 시간씩이다 보니 정작 손 선수가 4위로 17.5㎞ 지점을 막 통과하던 순간 라디오 중계방송은 무자비하다 싶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궁금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다음날인 8월 10일 새벽 1시30분쯤 손 선수가 2시간29분19초로 마라톤에서 우승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2시간30분의 벽을 넘은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남 선수도 3위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만세를 외쳤다. 암울했던 식민지 조선에 빗줄기처럼 감격의 눈물이 뿌려졌다.

# 손 선수가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베를린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의 결승점을 향해 질주할 때 마지막 스퍼트는 100m를 15초에 달리는 놀라운 속도였다. 정말이지 ‘혼이 담긴 역주’였다. 그런데 손 선수는 결승점에 골인하자마자 신발부터 벗었다. 운동화를 벗은 손 선수의 발은 피투성이였다. 당시 손 선수가 신고 뛰었던 신발은 엄지발가락과 나머지 발가락 사이가 분리된 일본식 운동화였다. 이것이 손 선수에게는 잘 맞지 않고 뭔가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녕 더 불편한 것은 가슴에 단 일장기였다.

# 뛴 사람은 조선 청년 손기정과 남승룡이었건만 그들의 가슴에 달린 것은 일장기였다. 식민지의 설움이 그때만큼 크게 다가온 때가 또 있었으랴. 급기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선 손 선수 가슴의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그 유명한 일장기 말살사건이었다.

# 사진 속의 일장기는 지울 수 있었다지만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새겨진 우승자 명단엔 조선 청년 손기정의 국적이 여전히 ‘JAPAN’으로 표시돼 있었다. 70년 8월 15일 새벽,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씨가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몰래 들어가 끌과 정으로 다섯 시간 동안 작업한 끝에 ‘JAPAN’을 ‘KOREA’로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서독 경찰은 그를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 파손’ 혐의로 체포했다. 그의 노력도 헛되이 결국 ‘KOREA’는 다시 ‘JAPAN’으로 환원되고 말았다.

# 손기정도 남승룡도 이미 고인이 됐다. 국회의원 신분으로 끌과 정을 들고 ‘JAPAN’을 ‘KOREA’로 바꾸는 일을 결행했던 박영록씨는 아직 생존해 있지만 서울 삼선교 근처에서 집도 없이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아가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의 성화가 타오르기 시작한 지금, 우리는 태극기도, 대한민국 ‘KOREA’라는 국호도 별다른 감흥없이 바라보기 일쑤다. 선명한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의 선전하는 모습을 신문·방송·인터넷 등 온갖 미디어를 통해 쉼없이 보겠지만 정작 하루 두 번 그것도 한 시간씩만 실황 중계되던 70여 년 전만큼도 감동하지 못한다면 왜 그럴까? 절절하고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가슴의 태극마크와 대한민국 ‘KOREA’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70여 년 전에는 그 얼마나 절실했던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