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겸로翁,고서점 '通文館' 대물림 새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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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리 고서계(古書界)의 대부,고서점 「통문관(通文館)」주인 산기(山氣)이겸로(李謙魯.87)옹이 60여년 몸과 마음에 밴 서향(書香)을 간직하고 은퇴했다.
서울안국동 네거리에서 화랑.골동품상이 빼곡한 인사동 길로 방향을 틀어 몇걸음 옮기면 오른쪽에 보이는 통문관.
李옹이 해방 이후 우리 고서 유통과 연구의 산파역을 맡은 유서깊은 그 곳을 뒤로 한 것이다.
통문관은 올들어 이달 초까지 석달반 동안 셔터가 굳게 내려져고서애호가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지난해 12월 중순께 李옹이 폐렴으로 입원했기 때문이다.
10평이 조금 넘는 통문관에 햇살이 다시 든 때는 지난 8일.그러나 李옹의 예의 그 온화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대신 그의 둘째아들 동호(東虎.57)씨가 손님들을 맞았다.통문관에도 이른바 2세 경영시대가 열린 것이다.
李옹은 『지난해말 퇴원했지만 나이를 생각해 손때 묻은 서점을아들에게 완전히 넘겨주었다』고 말했다.또 『아들이 그동안 고서점을 운영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별 걱정은 없다』고 덧붙였다.
사실 20대초부터 아버지 일을 도왔던 동호씨는 84년부터 통문관 인근에 「신문관」이라는 고서점을 꾸려왔다.
대기업도 아닌 작은 고서점의 대물림 경영이 주목받는 연유는 통문관과 이를 지켜온 李옹의 특별한 위상에서 비롯한다.옛날의 명성은 촛물 녹듯 쇠락했지만 통문관은 70년대까지 한국학 연구의 든든한 연결고리였다.국문학.국사학.민속학.고고 학.미술사 등 국학연구자들이 반드시 찾아야 할 서점이자 사랑방 구실을 떠맡았다. 실제로 50~60년대 진단학회.국어국문학회.민속학회.
서지학회.고고미술동인회 등 여러 단체들은 이곳을 연락사무소로 애용했다.송욱(宋稶).고유섭(高裕燮).김원룡(金元龍).이희승(李熙昇).최순우(崔淳雨)박사 등 이제는 고인이 된 명학자 들이이곳의 단골이었고 진홍섭(秦弘燮).황수영(黃壽永)씨 등 노학자들은 지금도 여기를 찾는다.
평남용강 출신으로 17세에 책방점원으로 출발한 李옹이 처음으로 서울관훈동에 차린 서점은 「금항당(金港堂)」.34년 25세의 나이였다.참고서와 교과서를 취급하다 고문헌과 인연을 맺었다.43년 현 위치로 옮기고 광복 직후 고려시대 통 역관을 양성했던 기관의 이름을 따 통문관 간판을 달았다.
학계는 李옹이 고서발굴과 보전,전파에 헌신적으로 기울인 노력에 늘 감사해 한다.
『혼돈된 해방정국에서 쏟아져 나온 국보급 고서.자료들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경우가 많았어요.이때부터 고서발굴에 뛰어들었지요.』 대표적 사례로는 일본인이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던 『월인석보』와 상하이(上海)임시정부가 두책으로 묶은 『독립신문』을 발굴하고 연세대에 기증한 일,이희승 선생의 소개로 『삼국유사』를찾아 서울대에 소장케한 일 등이 있다.
***고려시대 관청이름 본떠 李옹은 또 해방 이듬해 통문관과같은 이름으로 출판사를 등록,이윤재(李允宰)선생의 『성웅 이순신』을 시작으로 『청구영언』『주해 훈민정음』『국어변천사』등 남들이 꺼려했던 국학관련 도서 60여종을 펴냈다.
61년에 그가 영인한 『월인천강지곡』은 닥종이에 오프셋 인쇄를 한 뒤 연화문(蓮花紋)능화판으로 옷을 입혀 전세계에 우리 서지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했다.이 책은 91년 한국의 유엔가입 기념으로 유엔본부에 기증됐다.李옹 자신도 87년에 그가 인연을맺었던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모아 『통문관 책방 비화』라는 저서도 선보였다.
그는 종종 스스로를 고서더미에 깊숙이 숨어 책을 갉아먹는 벌레 「서두」에 비유하며 너털웃음을 짓곤했다.李옹은 이번에 은퇴하면서 출판사를 따로 떼내 셋째아들 동향(東鄕.고려대교수)씨에게 물려주었다.하지만 대물림에 접어든 통문관의 앞 날에는 짙은안개가 가득하다.대형서점이 들어서고 고서인구가 급감하는 등 80년대 이후 몰아친 급격한 사회변화로 경영여건이 어려워진 때문이다. 李옹은 『최근 들어 통문관을 찾는 발길이 하루 평균 20여명에 그친다』고 말했다.하루 평균 수입도 20만원 정도.
그러나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고서유통시장이 거의 정지한 현상이다.소장가들이 책을 거의 내놓지 않아 찾는 사람이 있어도대부분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 동호씨는 『통문관이라는 세 글자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한다.『서점을 활성화할 묘안은 아직 없으나 고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판매보다 일단 도서확보에 주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전통문화 파수꾼」「국학발전의 전령」등의 수식어를 달고 60년을 넘게 통문관을 키워 왔던 李옹은 크게 두 가지가 아쉽다고말했다. ***『월인석보』등 대학 기증 『보통학교 4년 졸업이학력의 전부라 역량부족을 실감했어요.틈틈이 한문을 공부하며 지식을 넓혔지만 한계가 분명했지요.또 사교성이 없어 「조선왕조실록」영인본제작 등 좋은 기회도 많이 놓쳤지요.』 李옹은 은퇴한만큼 책방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그리고 남는 시간에 소장도서 1만여권을 정리하고 관광도 가겠다고 미소를 지었다.미수(米壽)를 한해 앞둔 李옹.보청기와 지팡이를 제외하곤 건강한 모습이었다.
지금도 새벽2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李옹의 손을 떠난 통문관이 21세기가 코앞에 닥친 현재 어떤 식으로 생존전략을 펼쳐나갈지 주목거리다.
박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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