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週를열며>영웅으로 남을 자유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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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는 우리의 영웅,마라토너 황영조(黃永祚)를 참 좋아한다.마라톤은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는데,황영조가 가장 멋있게그 싸움에서 이기는 모습을 온 세계에 보였기 때문이다.또 몬주익 우승의 순간뿐만 아니라 그의 연습과정이나 인 생 여정이 온통 처절하게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국민은 황영조가 다시 한번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우승해주기를 기대해 왔다.기대나 바람이라고 하지만 그 강도가 너무 세어길 수 없는 엄한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한육상연맹은 동아마라톤 전에 국내 선수 가운데 1,2,3등만 올림픽에 출전시키겠다고 원칙을 정했는데,안타깝게도 황영조는중간에 쥐가 나 멀리 처지고 말았다.그러나 많은 국민은 어떻게해서든 황영조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 야 한다고 소리쳤다.삼척시의회는 황영조를 애틀랜타로 보내 달라는 건의안을 채택했고,한 텔레비전 방송의 전화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반이상이황영조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방송 직후 육상연맹은 당초의 방침을 바꿔 황영조를 애틀랜타 파견 예비후보에 포함시켰다.육상연맹은 경기 직전의 컨디션을봐 출전선수를 조정한다고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어떻게든 3등안에 든 한 사람이 빠지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러나 3위인 김이용은 일찌감치 이런 말을 했다.『개인택시를모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집에도 안가면서 혹독한 겨울훈련을 견뎌온 나에게 양보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말이다.
나는 황영조가 지난 올림픽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가운데 하나를 기억한다.같이 출전한 동료선수가 일본 선수를 견제해 주었기 때문에 황영조가 마음놓고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그러나 황영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선수를 오 래 기억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나도 그 선수의 이름을 모른다.사람들은오직 승리의 결과만 가지고,그 승자에게만 미쳐버린다.양보하고 나면 곧장 잊혀져버릴 그런 출전자격 선수들에게 스스로 빠져 달라고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인가.
황영조도 사람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으리라.사람들은 영웅을 원한다.한번만 승리하고 마는 영웅이 아니라 계속 출전하고 계속이기는 그런 영웅 말이다.그런 바람의 우리에게 어찌 황영조가 겁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다시 출전해서 우승하지 못하는 게 겁나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의 가슴속에 영웅이 없어져버리는 결과가 겁날 것이라는 말이다.
지난 바르셀로나올림픽 후에 가진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황영조는 이런 내용의 말을 한 적이 있다.마라톤 우승으로 어머니와온 국민을 기쁘게 한 것은 참 좋지만 그 우승을 이루기까지의 혹독한 연습은 너무도 무섭고 끔찍해 가능하면 마 라톤을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그런지 얼마후에 황영조는 은퇴를 발표했다.뒤에다시 마라톤을 계속하기로 번복하긴 했지만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나는 이번의 동아마라톤 성적도 황영조의 간접적 또는 무의식적의사표시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풀이하고 싶다.황영조는 경기직후 가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프다는 핑계로 레이스를 포기했다는 주위의 비난을 듣기 싫어 억지로 동아마라톤 코스를 완주했다』고 말했었다.
쉬자.마음을 쉬자.황영조를 풀어주자.황영조가 고3 입시생도 아니고,우리가 그를 보채는 학부모도 아니다.황영조는 영원히 추락하지 않는 영웅으로 기억될 자유가 있다.우리 모두 그 자유를존중해 주자.
이 자유가 어찌 마라톤부문에만 국한되겠는가.사람이라면 누구나인생의 모든 부문에서 영원히 영웅으로 남을 자유가 있고,또 그것을 누리고 싶지 않겠는가.
석지명 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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