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깊어진 지구촌 ‘리더십 상실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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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세계가 갖가지 이해 대립과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으나 이를 해결할 글로벌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지도국가였던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잡혀 제 앞가림도 힘겨워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말만 많지 이를 뒷받침할 능력은 없는 상태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중국·인도·브라질 등은 이해 관계에 얽매여 지구촌 문제에 등을 돌리고 있다. 이로 인해 테러 척결과 지구온난화 방지, 핵무기 확산 금지, 세계 경제 위기 극복 등 세계 공통 과제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데이비드 브룩스 뉴욕 타임스(NYT) 칼럼니스트는 1일 “국제 사회는 글로벌 리더십이 없는 무기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되는 일 없는 국제사회=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개발어젠다(DDA·도하라운드)가 지난달 말 스위스 제네바에서 결렬됐다.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선진국 시장을 대폭 개방하기로 한 약속이 7년간의 협상에도 무산된 것이다. 인도와 중국이 걸림돌이었다. 인도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농민 표를 잃을 수 있는 농업시장 개방안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은 식량 안보를 이유로 인도를 편들었다. 마리안 피셔 보엘 EU 농업담당 집행위원은 “무역협상도 합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기후 변화와 같은 새로운 도전을 다루겠느냐”고 한탄했다.

지구온난화 방지도 표류하고 있다. 각국은 내년에 선진국만 온실가스(이산화탄소) 배출을 의무적으로 줄이도록 한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기후변화협약에 합의해야 한다. 선진국은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중국이나 인도도 의무적 감축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 등은 “지구온난화는 선진국의 배출 때문”이라며 반발한다.

아프리카의 수단 다르푸르에서는 수십만 명이 학살당해도 국제사회는 무기력하다. 미국·유럽이 수단 정권을 비난하며 경제 제재를 들먹여도 꿈쩍하지 않는다. 수단에서 석유를 수입하는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해 경제 제재를 막기 때문이다. 중국은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도 보호하고 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도 마찬가지다. 미국·유럽이 당근과 채찍을 내보여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강경하게 버티고 있다. EU 국가 대부분이 지지하는 리스본 조약(EU의 정치적 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유럽헌법 개정안)은 아일랜드의 반대로 교착상태다.

◇다극체제의 한계=2차대전 직후 미국은 세계 경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며 확고한 국제사회의 리더였다. 미 정치지도자들은 마셜 플랜을 마련해 유럽 경제의 부흥을 돕는 등 당파를 초월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인도 등이 부상하면서 미국의 힘이 약화했다. 여기에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잡히며 미국의 지도력은 심각하게 훼손됐다. 그 결과 국제 현안에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미국에선 이를 지도할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는 점도 문제다. 이라크 전쟁과 경제 정책 실패 등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29%로 떨어졌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더 낮은 17%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도 26%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보다 약간 높지만 역대 지도자 중에서는 바닥권이다.

브룩스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연합해 국제 현안에 책임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그나마 글로벌 리더십을 회복하는 최선의 방안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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