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휘발유값, 원유보다 싸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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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국제 휘발유 값이 원유 값을 밑도는 일이 벌어졌다.

4일 한국석유공사 석유정보망(www.petronet.co.kr)에 따르면 1일 싱가포르 현물시장에서 거래된 국제 휘발유(옥탄가 92) 현물 가격은 배럴당 120.25달러였다. 반면 두바이유는 120.4달러로 휘발유보다 0.15달러 비싸게 거래됐다. 원유를 정제해 만드는 ‘제품’인 휘발유 값이 ‘원료’인 원유 값에 못 미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휘발유 값은 원유보다 배럴당 10~15달러 정도 높은 게 보통이며, 가격 역전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구자권 석유공사 해외조사팀장은 “고유가와 미국 경기 침체로 휘발유 소비가 확 줄어 휘발유 값이 크게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 휘발유 소비가 급증하는 휴가철 ‘드라이빙 시즌’인데도 좀체 소비가 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휘발유 소비는 4월 말부터 지금까지 14주 연속 전년 같은 기간보다 줄었다.

가격 역전의 조짐은 지난달 초에 나타났다. 휘발유-원유 값의 차이는 지난달 초 6~7달러로 줄더니 중순에는 2달러 차이까지 근접했다.

휘발유와 원유의 가격 역전 현상은 2001년 8월 2일에도 한 차례 일어났다. 당시 두바이유는 배럴당 24.56달러, 휘발유는 24.5달러를 기록했다.

원인은 역시 미국의 소비 둔화였다. 휘발유 재고가 늘면서 공급 과잉을 우려한 정유업계가 휘발유를 ‘떨이 처분’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휘발유 같은 석유 제품은 저장 시설 용량에 한계가 있어 조금만 안 팔려도 정유업체들이 처분에 나서 값이 급락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원유는 수요가 크게 줄지 않아 상대적으로 가격이 천천히 떨어진다. 예컨대 휘발유 수요가 줄어도 원유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경유 등 또 다른 석유제품 수요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경유 값은 1일 두바이유보다 배럴당 약 27달러 높은 147.91달러에 거래됐다.

휘발유-원유 값 역전을 국제유가 하락의 신호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세계 경제의 침체가 길어지면 발전·산업용으로 주로 쓰이는 경유 수요도 줄고, 결국 원유 값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2001년에는 가격 역전에 따른 큰 폭의 유가 하락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25달러 선으로 워낙 낮았기 때문이다. 당시엔 가격 역전 다음날 두바이유가 0.48달러 떨어진 24.08달러에, 휘발유는 0.68달러 오른 25.18달러에 거래됐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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