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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지적 레슬링’ 직접 맞붙어 씨름해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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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번 22차 세계철학대회의 특징 중 하나는 영미 분석철학계의 스타 학자들이 대거 방문했다는 데 있다. 영미 철학의 인식론·윤리학·심리철학·언어철학 등 한 자리에 모으기 힘든 각 분야의 대가들이 매일 같이 서울대 캠퍼스를 누빈다. 거장들이 소장파 학자들과 논쟁을 펼친다. 철학계의 사상적 세대교체가 서울에서 진행 중이다. 제임스 프라이어(40·미국 뉴욕대 교수)는 영미 인식론에서 가장 촉망 받는 소장 학자다. 젊은 나이에 하버드대·프린스턴대 교수를 거쳐 뉴욕대에 부임했다. 인식론의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는 강의로도 인기가 높다. 뉴욕대 박사과정에 있는 김현섭(30)씨가 3일 프라이어 교수를 만나 인식론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프라이어 교수는 “철학은 지적 레슬링이다. 철학적 문제들과 직접 맞붙어 씨름해 보라”며 젊은 철학도들의 투지를 요구했다.


▶김현섭(이하 김)=이번 대회는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 ‘철학 올림픽’이다.

▶제임스 프라이어(이하 프라이어)=한국의 뜨거운 관심에 매우 놀랐다. 학계는 물론이고 정부와 기업의 후원도 대단하다. 대회 로고가 들어간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2002년 ‘붉은 악마’들의 열띤 월드컵 응원처럼 철학대회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김=이번 철학대회의 의의는 무엇인가 .

▶프라이어=‘철학 올림픽’이란 말처럼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는 자리다. 국제 학술사회에는 논문뿐 아니라 인적 교류가 중요하다. 학계 여러 분야 인물들과 직접 대화하며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다. 특히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지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훌륭한 계기다.

▶김=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철학이 쉽지 않은 학문인 것 같다. 사람들은 늘 어떤 사실을 지각하며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지만 ‘인식론’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프라이어=인식론은 지식의 본질과 인식의 정당성 문제를 묻는 학문이다.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를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를 다룬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 주변을 둘러본다면 어떨까. 시각·촉각 등 온갖 감각을 통한 경험이 나의 의식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김=최근에는 ‘매트릭스’ 같은 공상과학 영화를 통해 일반인도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반성해 볼 기회가 생긴 것 같다.

▶프라이어=눈 앞에 보이는 대상까지 의심해 들어가는 회의론과 이에 대한 응전으로 믿음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를 찾아 온 것이 인식론의 역사다. 세상에 대해 처음으로 지각하는 상황은 우리가 어린아이로서 실제로 겪었던 과정이다. 이 세계에 대한 첫 지각과 믿음이 이뤄졌던 불과 수십 년 전의 일을 우리 스스로가 잊어버린 셈이다. 인식론적 주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흥미로워 한다.

▶김=학생들이 철학을 공부하려면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은가.

▶프라이어=철학이란 ‘지적 레슬링’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인 문제 자체와 직접 맞닥뜨려서 논쟁해보라.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은 사상의 역사를 암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김=당신은 지난해 서울대에서 인식론 집중 강의를 열었다. 한국 학생들에 대한 평가는.

▶프라이어=지적 예민함이 느껴지는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발표나 토론에 소극적이다. 한국 학생들은 교수의 견해를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과 경청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는 철학적 사고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큰 소리로 논쟁하고 싸울 수 있어야 한다. 학문에 가장 큰 장애물은 소극성이다.

정리=배노필 기자


차기대회 개최지 그리스 아테네

2013년 제 23차 세계철학대회 개최지는 그리스 아테네로 결정됐다. 세계철학대회 113년 역사상 서양 철학의 고향인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대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리스 철학회 데메트라 스펜도니-멘트주 회장은 3일 서울대에서 열린 세계철학연맹(FISP) 총회 직후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있었던 유서 깊은 도시 아테네에서 고대와 현대 철학의 역사적 대화가 마련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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