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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사건 연루, 10년 복역한 자유주의자 레이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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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34면

1946년 겨울 개정헌법 초안을 작성하던 중 국민당의 군부대를 방문한 레이전(오른쪽에서 둘째). 맨 오른쪽은 참모총장 바이충시(白崇禧). 김명호 제공

1895년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한 학자가 자유주의(自由主義)라는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중국과 서구의 차이는 자유의 유무에 있다.” “자유는 서구 부강의 근본이다.” “부강해지려면 자유주의를 신봉해야 한다.” 자유에 관한 말들이 난무했다. 서구의 강권에 대처하려면 그들이 강해진 이유를 알아야 했다. 자유 때문에 강해졌다니 자유가 뭔지 궁금했다. “외부의 구속이나 압박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자유주의를 보급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

후스(胡適)가 자유주의의 핵심은 ‘자유’라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를 뺀다면 장판교 싸움에 조자룡이 없는 것과 같고, 제갈량이나 주유가 없는 적벽대전과 같다”고 하자 금방 이해가 됐다. 자유주의 신봉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자가 아니면 지식인 축에 끼지도 못했다.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자 자유를 거론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명분을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책임을 지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국공 내전의 판세가 심상치 않았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날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양쪽이 서로 싸울 때는 활동공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한쪽을 택하거나 양쪽을 다 부정해야 할 판이었다. 자유주의자라 자처했던 것을 후회했지만 그간 하고 다닌 말들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자유의 가치를 부인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생겨났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자유’와 ‘진보’를 얘기하던 사람들일수록 정도가 심했다. 이들 속에서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나올 리 없었다. 중국의 자유주의를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은 자유와는 거리가 먼 국민당의 수뇌부에 웅크리고 있었다.

레이전(雷震·1897∼1979)이야말로 중국의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국비로 일본 나고야고등학교를 마치고 교토제국대학에서 헌법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고교 교장을 거치며 직접 두 개의 중학을 설립해 명문으로 키웠다. 국민당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대륙 통치가 붕괴할 무렵에는 당내에서 무시하지 못할 존재로 성장해 있었다. 당시 수도였던 난징 일대에 그의 지지자가 많았다.

1949년 3월 국민당 개조에 분주하던 레이전은 상하이에서 ‘자유중국(自由中國)’이라는 잡지를 발행해 시국에 관한 의견을 발표하자고 후스 등에게 제의했다. 다들 동의했다. 장제스를 찾아가 보고하자 장도 찬성했다. 후는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자유중국의 종지’라는 글을 만들어 보냈다.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전 국민에게 선전하고, 정부를 향해 정치와 경제의 개혁을 촉구하며,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의 건설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같은 해 10월 레이전은 대만으로 철수했다. 타이베이 허핑둥루에 ‘자유중국사(自由中國社)’라는 간판을 내걸고 창간호를 출간했다. 기획에서 출판까지 1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발행인으로는 미국에 있는 후스의 이름을 내걸었다.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용인(容認)”이라고 분명히 말한 적이 있지만 수십 년간 자유라는 말을 워낙 많이 써먹었기 때문에 후스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50년 1월 국민당 개조 방안 좌담회에 참석한 레이전이 군대를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제안했다. ‘당의 군대’가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장제스는 ‘자유중국’의 편집인들을 대거 내각으로 끌어들여 레이전과 분리시켰다. 레이전도 총통부 국책고문에 임명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시민들을 죄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사론으로 풍파를 일으켰고 “총통 연임 반대” “삼민주의 교과과정 철폐” 등 매달 두 번 잡지가 발간될 때마다 조용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레이전은 당적을 박탈당하고 국책고문 자리에서 쫓겨났다. 발행인으로 이름만 걸어놓았던 후스는 사퇴했다.

60년 5월 야당의 출현을 주장하는 사론은 ‘자유중국’의 종말을 예고했다. 9월 4일 경비총사령부는 레이전을 체포했다. 간첩을 신고하지 않은 죄로 10년형을 선고했다. 후스는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지만 그는 나 때문에 죽었다”며 애통해했다.

‘자유중국’은 10년9개월간 260호까지 발간된 냉전시대 중화권 자유주의자의 산실이었다. 인하이광(殷海光) 등 수많은 자유주의자를 배출해낸 레이전은 만기 출소한 후에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자택에서 연금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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