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중세 라틴어 역할…한국 조기교육 긍정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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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내를 둔 비토리오 회슬레 교수는 한국 문화의 미래를 밝게 내다 보았다. 다양한 종교의 대화, 동서양 사상의 융합을 기대했다. [세계철학대회 제공]

 지난달 29일 이화여대 해외석학 초청강연에서 한 독일인 교수가 강의를 했다. 매우 빠른 속도의 영어를 구사했다. 강연과 질의 응답이 끝난 뒤 강연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못다한 질문, 사적인 인사가 오가는 자리다. 순식간에 영어와 독일어가 오갔다. 그는 역시 빠른 톤으로 영어로, 독일어로 대화를 이었다. 누군가 다가가자 이번엔 폭발적인 발음으로 러시아어를 쏟아냈다.

 비토리오 회슬레(48·미국 노터데임대) 교수다. 유럽의 68혁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사유의 물결인 탈근대 사상에 반기를 든 이성주의 철학자다. 플라톤·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을 새롭게 복권시키는 철학적 기획을 펼치고 있다. <본지 2월6일자 17면 참조>

그가 이화여대 강연에서 발표한 내용은 ‘학술세계의 보편 언어로서의 영어’다. 그의 전방위적 관심사를 잘 보여준다. 제22차 세계철학대회의 주목 받는 학자 중 하나인 그를 1일 만났다. “안녕하세요. 조금 늦었습니다.” 이번엔 한국어다. 잘 알려진 바대로 그의 부인은 한국인이다. 한국 문화의 가능성, 언어교육과 대학개혁 등에 대해 물었다.

-이화여대에서 했던 강연을 소개한다면.

“영어는 이제 학술 세계의 보편언어(universal language)가 됐다. 중세 시대 라틴어가 맡았던 역할이다. 18세기까지도 지식인들은 대부분 2~3개의 언어를 구사했다. 학계의 보편언어가 사라졌던 기간은 민족주의의 시대인 19~20세기에 불과하다. 이젠 영어라는 보편언어를 통해 학술 성과가 거의 실시간으로 학계에 알려진다. 학계가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다.”

-영어의 패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부정적인 측면도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다양성은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보편언어로서 영어가 부상하면서 영어가 모국어인 화자들이 되레 문화적 다양성에 취약해질 수 있다. 영어권 화자들도 다른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 다른 언어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2~3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에서도 영어 열풍이 거세다. 특히 사교육비와 관련해 우려가 크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치려는 것은 긍정적이다. 사교육비 문제도 알고 있다. 비싼 학원(‘학원’은 한국어로 발음)에 보내야 하고. 교육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의무다. 이와 함께 가진 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국가는 공립학교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훌륭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부자들이 재단을 만들어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학생을 발굴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대학개혁 문제도 제기했다.

“유럽 대학은 자국어 강의를 고집하는 문화적 폐쇄성으로 미국 대학에 밀렸다. 한국 대학도 영어 강의를 늘리고 외국인 교수를 많이 데려와야 한다. 그들의 언어와 학문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의 사유방식을 배우라는 것이다. 한국 대학은 독창적인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다. 외국인 학생도 더 유치해야 한다.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창조적인 사상이 나온다.”

-7~8개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들었다. 당신의 모국어는 무엇인가.

“어머니가 이탈리아인이고 아버지는 독일인이다. 집에서는 이탈리아어를 썼다. 6세 때 학교를 다니면서 독일어를 정식으로 배웠다. 학술 언어는 독일어와 영어다. 한국어는 너무 나이가 들은 뒤에 배워서 그런지 가장 어렵다. 잘 하지 못한다. 가족(한국인 부인과 9살 쌍둥이 아들이 있다) 사이에선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주로 쓴다. 한국어는 화용론적 특성이 풍부한 언어다. 남을 높이는 존댓말뿐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 표현도 있어 어렵다. ‘비가 온다’는 표현도 상대에 따라 ‘비가 옵니다/오네요’ 등 다양하다.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풍부한 화용론적 세계 속에 한국인의 정신이 있는 것 같다.”

-한국문화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동양사상이 당신 철학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과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 등을 감명 깊게 봤다. 동양의 문화·사상에 대한 나의 이해는 깊지 않다. 초월론적인 원칙을 내세우는 유럽철학 전통을 계승하는 나의 사유방식과 아직 거리가 있는 것 같다. 한국문화만으로 봤을 땐 종교적 다양성이 흥미롭다. 유교·불교·샤머니즘이 공존할 뿐 아니라 기독교적 전통도 강하다. 일본과 다른 측면이다. 이런 한국적 토양에서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종합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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