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장이 무대로, 담장이 캔버스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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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05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태양빛이 뜨겁다. 서 있기만 해도 땀방울이 송송 맺히는 한낮의 도심. 바닥에 깔린 너른 흰 천 하나가 행인들의 눈길을 끈다. 안내 멘트 하나 없이, 맨발의 네 남녀가 천 위에 올라섰다. 일렉트로닉 록음악과 함께 그들은 콘크리트 바닥에 안길 듯 깔리기도 했고, 병풍처럼 펼쳐진 빌딩 숲에 닿을 듯 뛰어오르기도 했다. 발레와 현대 무용이 결합된 10분간의 춤사위가 끝나자 땀에 흠뻑 젖은 무용수들에게 거리 관객들이 갈채를 보냈다.

-뉴욕 예술가들의 실험과 혁신

지난달 말 뉴욕 맨해튼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의 선착장에서 열린 ‘360도 댄스 컴퍼니(360 degree dance company)’의 거리 공연 장면이다. `Maktub`란 제목의 작품은 올해 5회째를 맞는 ‘사이트라인즈 2008’의 한 행사로 소개됐다. ‘사이트라인즈’는 로어맨해튼문화협회(Lower Manhattan Cultural Council. LMCC)가 거리 예술, 특히 장소 특정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을 장려하기 위해 여는 연례 축제다.

비지땀 속에 공연을 마친 마틴 로프네스는 “정박한 배들과 고층 빌딩이 조화를 이룬 야외 무대와 우리의 몸짓이 보다 파격적으로 어우러진 것 같다”며 “조명·음향 등이 실내 공연장과 다르지만 흥미롭고 멋진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Maktub’는 엄밀하게 말하면 공간(여기선 도심 거리)을 감안해 제작된 장소 특정 공연은 아니다. 오히려 뉴욕 타임스 7월 23일자 ‘댄스 리뷰’가 지적한 대로 공간 안에서 재해석되는 무용의 역동성을 감상하는 게 포인트다. 뉴욕의 여름엔 이런 시도들을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다.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에서 열리는 뉴욕 필하모닉 공연과 서머 스테이지 등은 해마다 구름 같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야외 이벤트다. 이런 흐름에서 다소 소외돼 있던 로어 맨해튼 지역에선 9·11 테러 이후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 왔다.

뉴욕주 경제개발실무단(Economic Development Working Group)이 작성한 ‘로어 맨해튼 창조 도시 뉴욕’ 프로젝트는 창조 인구가 선호할 수 있는 도시 및 주거 환경을 마련하고 예술가를 위한 공간 제공과 세제 혜택까지 제안했다. 선착장에서 펼쳐진 ‘Maktub’ 공연은 이런 문화산업과 공공 예술에 대한 지역적 이해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거리는 예술가에게 ‘무대’를 제공할 뿐 아니라 발상의 틀을 바꾸는 실험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11가 골목길엔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외벽 캔버스가 있다. 7월 말 현재 외벽 캔버스에는 다인(DAIN)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진행 중’이다.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작업 중인 작품이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이다. 노출된 거리의 스튜디오에서 행인들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그대로 목도할 수 있다.

이 갤러리 에스페이스(Espeis)의 내부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전 작품이 전시돼 있다. 거리 아티스트 모모(MOMO)와 순수 미술가 멜리사 브라운(Mellisa Brown)이 합작해 만든 가로 약 9m, 세로 2.4m의 대형 작품(제목 없음)이다. 두 작가는 6월부터 한 달간 번갈아 가며 서로의 작품을 ‘파괴’했다.

한 사람이 먼저 그린 표면에 이틀 후 다른 사람이 통째로 새 작업을 하는 식이다. 이렇게 15번의 덧칠을 거쳐 최종 작품이 나오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 화면이 갤러리 내에 함께 전시되고 있다. 뉴욕 거리의 그라피티(낙서 벽화) 에너지를 상업 미술의 틀 안으로 세련되게 흡수한 듯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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