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국프리즘

마을 단위의 생명공간‘둠벙’을 되살리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많은 화가·소설가·시인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이 녹아들었다고 고백한다. 문인이나 화가가 아니더라도 농촌이나 산촌에 뿌리를 둔 4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기반으로 생활의 활력을 찾고 있다.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의 중심에 있는 것 중 하나가 ‘둠벙’이다. 둠벙이란 물웅덩이 혹은 웅덩이의 방언으로 물의 공급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샘이 솟는 곳에 1~2m 깊이의 땅을 파고 돌이나 흙으로 주위를 둘러싼 소규모 마을 연못이다.

둠벙에는 장구말·해캄·유글레나·물벼룩, 짚신벌레·검정말·붕어마름·개구리밥·마름·세모고랭이·줄·부들·소금쟁이·장구벌레·물방개·장구애비·물장군·논우렁이·잠자리유충·거머리 등의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개구리가 산란처로 이용하고, 물속 생물을 잡기 위해 간간이 왜가리가 찾아온다. 잠자리를 비롯한 다양한 곤충이 날아들고, 겨울철새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둠벙과 도랑은 또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자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생명 공간에 대한 자연학습장이다. 물을 빼는 시기엔 논 생물의 피난처 역할을 하고, 봄에는 다시 논에 물을 대 생명의 순환 고리 역할을 한다. 즉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소우주이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하는 매우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둠벙이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산업화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많은 저수지·댐과 수중보가 만들어지고 콘크리트 농수로가 건설됐다. 또 보다 원활한 물의 공급과 기계화 영농을 위해 경지정리 작업이 수행됐다. 이 과정에서 하천과 농수로의 직강화와 하천의 역동성이 사라짐으로써 생물의 서식 공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최근의 국제화와 세계화는 우리의 농업경쟁력을 저하시켰고, 그로 인해 전국 각지에 묵힌 논이 넘쳐난다. 특히 산지 계곡 사이의 다랑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방치되고 있다. 이제 산지 계곡부에 버려진 다랑논의 일부를 이용해 다시 둠벙을 되살려 보자.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둠벙이 아닌 마을의 생명공간 창출을 통해 고향의 향수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불러올 수 있는 둠벙을. 둠벙을 되살리는 데는 큰 예산이 필요 없다. 땅을 파고 물만 가두어 놓는다면 나머지는 모두 자연이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10월에는 창원에서 “건강한 습지, 건강한 인간”이라는 주제로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습지의 보전과 건전한 활용 방안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둠벙 혹은 마을단위 생태 연못의 창출은 ‘생각은 지구적 차원에서, 행동은 지역 차원에서’라는 구호에도 적절한 사업이고, 개발과 보전이 조화된 우리의 자연문화유산을 되살릴 수 있는 상징이 될 수 있다.

이규송 강릉대 생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