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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할아버지의 꿈을 현실로 이룬 유러피안 클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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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드라이버가 기가 막히게 맞는다 싶더니 여지없이 아이언 샷이 무너진다. 어느 날은 그린에서 퍼팅 라인이 눈에 그대로 들어온다 싶더니 어프로치가 그린을 훌렁 훌렁 넘어가 버린다. 아마추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풍선효과’. 드라이버 샷을 제압했다 싶으면 잘 맞던 아이언 샷이 문제로 솟구치고, 아이언 샷을 제압했다 싶으면 어프로치가, 퍼터가 불쑥 불쑥 고개 들고 문제를 일으킨다.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은 화창한 하늘 아래 좋은 골프장을 만나 운동을 마치고 맛있는 식당에서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우리 생애 최고의 날을 보내는가 싶더니 밤 늦게까지 숙소를 잡지 못해 결국 제로섬으로 돌아가버리는 날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남쪽 해변 마을 Wicklow에서는 맛있는 음식, 편안한 잠자리, 좋은 날씨, 멋있는 골프장, 즐거운 사람을 두루 만나는 횡재를 누렸다.

낮에는 골목 굽이굽이가 동화처럼 알록달록한 마을, 밤에는 호숫가에 비친 야경이 중세 유럽를 연상시키는 묘한 매력의 Wicklow를 찾은 것은 아일랜드 내 골프장 랭킹 2위 The European Club을 찾아서다. 이 마을에서 20분 거리의 Brittas Bay 해변에 자리잡고 있는 The European Club은 1993년에 오픈한 비교적 신생 골프장이다. 하지만 영국&아일랜드 골프장 순위에서 10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몇몇 홀은 세계 100대 홀에도 올라가 있는 유명 링크스이기에 우리에겐 Must Go 아이템이었다.

일찌감치 Wicklow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편안한 맘으로 맛있는 저녁 식사에 기네스 맥주를 홀짝대다 알딸딸해질 무렵, 댄스 동호회로 보이는 20여명의 대열이 식당에서 아일랜드 전통 음악을 틀어놓고 포크댄스 라이브를 벌이는 것이 아닌가. 연령대도 천차만별, 복장도 면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 태반, 춤추다 지치면 자리로 돌아와 맥주 몇 모금 들이키고 다시 대열에 합류하는 모습들… 역시나 흥이 많은 아일랜드다웠다. 우리도 술을 핑계 삼아 잠시 음악에 몸을 싣고 흥겨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유난히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기분 좋게 The European Club에 도착, 프로샵으로 들어섰다. 그린피를 내고 직원에게 간단히 코스 설명을 듣고 있는데 풍채 좋은 할아버지 한 분이 말을 걸어오신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오, 한국! 일본에는 몇 차례 가봤는데 한국은 못 가봤어요.”
“저도 영국은 몇 차례 왔었는데 아일랜드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하하. 난 이 골프장에 대해 해줄 말이 많은 사람이라 조인하면 좋을텐데 애석하게도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요.”
“예… 저희가 운이 없네요. 근데 여기 매니저이신가요?”
할아버지의 남다른 카리스마와 프로샵 직원들의 경직된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 저요. 소개가 늦었어요. 전 매니저이기도 하고 디자이너이기도 하고 가이드이기도 합니다. Pat Ruddy라고 합니다. 허허허”

자기가 간단히 코스 소개라도 해 주겠노라며 우리를 1번 홀로 데려가면서 그는 골프장의 탄생 배경부터 코스 특징까지 쉬지 않고 말했다. 어느 홀이 가장 포토제닉 하냐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더니 “3번 홀도 좋고, 7번 홀도, 12번, 13번, 15번, 17번 홀도 좋고….” 골프장에 대한 애정이 차고 넘치는 할아버지였다.

코스는 놀라왔다. 우린 이 곳에서 신생 링크스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해변을 끼고 불쑥 불쑥 솟아난 대형 사구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페어웨이가 펼쳐졌다. 페어웨이를 조금이라도 벗어난 공은 되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정작 내 공은 찾을 수 없는데 누군가 잃어버리고 간 공은 두 세 개씩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은 이들이 공을 분실하는 모양이었다. 벙커는 깊고 좁은 것도 모자라 벽면에 나무 널판자를 둘러쳐놓아 어줍잖은 탈출은 신체 손상까지 초래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13번 홀 그린은 벙커를 반쯤 걸치고 말발굽 모양으로 누워있는데 경사가 벙커를 향하고 있어 어설픈 온 그린은 곧장 인 벙커로 연장된다.

하지만 완벽한 잔디 관리와 20 홀(그렇다. The European은 18 홀이 아니다)의 변화무쌍한 디자인이 주는 충격은 신선했다. The European Club은 링크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재치와 유머가 어우러진 설계로 우리를 자극했다.

Pat 할아버지의 골프장 예찬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라운드를 마치고 감동에 겨워 다시 프로샵에 들렀다. 혹시나 Pat 할아버지를 만나면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직원을 통해 알게 된 바, Pat 할아버지는 이 골프장의 코스 디자이너이자 골프장 소유주이자 경영자라고 했다. 그의 몸 속에는 뜨거운 골프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골프 작가로 활동하던 그는 몇 개 골프장 건설에 자문역으로 참여하다가 자신이 꿈꾸는 골프장을 자기 손으로 직접 지어 보겠노라 결심하고 땅을 찾아 아일랜드를 뒤지기 시작했단다. 그러던 차에 Brittas Bay 상공을 날던 헬기 안에서 이 곳을 골프장 부지로 낙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가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골프장 설계도를 그려 본 적 없는, 설계의 ‘설’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틀에 박히지 않은 파격을 골프장 설계에 담아 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지금도 매일 코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고, 공사 현장을 지키며 직원들을 괴롭힌다고 한다. 가족들도 모두 골프장 근처 Wicklow로 이사 와 함께 경영에 투신하고 있다고 한다. 내게 이 친절한 설명을 해 준 프로샵 직원은 다름 아닌 Pat 할아버지 다섯 아들 중에 하나인 Matt였다.

70을 바라보고 계신 Pat 할아버지, 꿈을 현실로 만들어낸 집념도 놀랍지만 현실이 된 꿈을 즐기고 가꾸는 모습이 더욱 존경스러웠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