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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아침] ‘정육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정육점’ -조동범(1970~ )

죽음을 널어 식욕을 만드는 홍등의 냉장고

냉장고는 차고 부드러운,

선홍빛 죽음으로 가득하다

어둡고 좁은 우리에 갇혀 비육될 때까지

짐작이나 했을까

마지막 순간까지 식욕을 떠올렸을,

단 한 번도 초원을 담아보지 못한 가축의 눈망울은

눈석임물처럼 고요한 죽음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죽어서도 편히 눕지 못한

냉장고의 죽음 몇 조각,

무심하게 해넘이의 하늘 저편을 바라본다

죽음을 담고,

물끄러미 저녁을 맞고 있는 정육점

홍등을 두른 선홍빛 죽음이 화사하게 빛나는

정육점, 생생한 죽음 앞에서 식욕을 떠오르게 하는

칼날 같은,

죽음과 식욕의 경계



보라,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말하는가?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음에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용서함으로써 스스로를 용서받고 사랑함으로써 사랑받는다. 누가 홀로 있다 하는가? 흙과 쏟아지는 비와 이웃과 살아 있는 것들이, 살을 비비며 시작도 끝도 없는 빛을 뿜는다. 하여, 영혼은 형체에 깃드는 것으로, 형체는 죽어서 무너져도 영혼은 망하지 않고 날아가 산다. 영혼에 나무가 자라도록 기원하라. 그 나무, 영혼의 중심에 뿌리를 뻗고, 산 것과 죽은 것이 만나 이루는 깊은 고요에 개심(開心)하라. 정육점. 죽음을 널어 식욕을 만드는 홍등(紅燈)의 냉장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죽어서도 편히 눕지 못한 죽음 몇 조각. 살아 있을 때의 기억 속으로 고이던 하늘 저편의 저녁노을. 보라,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으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노래하겠는가? <박주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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