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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 현대판 여불위<下>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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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天台山)고찰을 방문한 장징장(가운데). 시기는 1936년 인광을 만난 후로 추정된다.

장징장(張靜江)의 행적은 여불위(呂不韋)를 연상케 한다. 세상이 뒤죽박죽이던 전국시대, 인질로 버려진 한 왕손을 본 상인 여불위는 거금을 투자하며 온갖 지혜를 동원해 세상을 한번 들었다 놓은 진시황을 만들어냈지만 결국은 버림받았다.
2000여 년 후 장징장도 한눈에 쑨원(孫文)을 알아보았고 장제스(蔣介石)라는 무명의 군인이 중국의 최고지도자에 오르기까지 혼신을 다해 후원했다. 그러나 말년은 여불위와 비슷했다.

신해혁명 후 귀국한 장징장에게 집안 조카가 장제스를 소개했다. 장제스는 조카가 운영하던 소금가게의 최말단 지점을 운영하던 사람의 유복자였다. 입원 중인 동향 선배를 찾아가 시국을 논하던 중 ‘퇴원하면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총으로 쏴 죽이고 도망다니는 신세였다.

장징장은 “잘 다듬으면 대기(大器)가 될 인물”이라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집안에 숨겨 주고 답답해할까 봐 밤마다 함께 외출도 했다. 쑨원에게 데리고 가 ‘싹수 있는 청년’이라며 중화혁명당에 입당시켰다. 쑨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계속 만들어 주었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달려가 신임을 사도록 했다. 권력의 원천이 된 황포군관학교 교장도 그의 간곡한 추천이 없었다면 장제스가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공(公)이야말로 저의 훌륭한 스승”이라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대견스러워했다. 장제스가 후일 군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당 원로의 자격으로 장을 북벌군 총사령관에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제휴는 혼인 문제까지 이어졌다. 장징장이 15세 소녀와 재혼하자 장제스도 부인의 친구인 천제루(陳潔如)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억지로 달래 장제스와 결혼시켰지만 쑹메이링(宋美齡)을 만나자 천과 이혼하려 했다. “잠시 미국에 가 있어라. 북벌에 성공한 후 혼인관계를 다시 회복하면 된다”며 장제스와 함께 천을 달랬고 미국행에 두 딸을 동행시켰다. 그는 원래 쑹메이링이라면 꼴도 보기 싫어했지만 여자를 오래 사귀지 못하는 장제스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잠시 그러다 말겠거니 했다. 장제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천을 버리자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장징장은 ‘건설위원회’를 조직했다. 서호박람회를 개최해 항저우를 관광도시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시발로 국가건설에 착수했다. 각지에 발전소를 건립했고 자원 확보를 위해 탄광들을 개발했다. 강남철도와 회남철도도 건설했다. 국제전화를 처음 개통시킨 것도 그였다. 1928년부터 10년간 ‘황금 10년’을 연출했지만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됐다. 장제스는 건설보다 공산당 소탕이 우선이었다. 장제스의 처남과 동서를 비롯한 새로운 세력들이 경제위원회를 만들어 명분을 앞세운 트집을 걸기 시작했다. 장징장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다.

시름에 빠져 있던 중 정토종의 13대 조사 인광(印光)을 만났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대성통곡했다. 인광이 떠난 후에도 맨땅에 주저앉아 애매한 땅바닥만 쳐댔다. 정신을 가다듬은 장징장은 대오각성한 사람 같았다. 정계를 떠났고 여자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염불과 참선에만 열중하며 이름도 선(禪)자가 들어가는 것으로 바꿔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흉악하고, 음흉하고, 더러운 게 정치와 여자의 생식기”라는 말을 자주 했다. 감격이 크다 보니 표현은 평범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곤혹스러워 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제네바·파리를 거쳐 뉴욕에 정착했다. 두 눈은 완전히 실명한 채 참선하며 아무도 만나지 않다가 1950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접한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공산당 숙청을 도왔지만 경제에 관해서는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장징장을 평가했다. 대만에서는 2주일간 영당(靈堂)을 차렸다. 장제스가 까만 완장을 차고 직접 영결식을 주재했다.

장징장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쑨원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지만 장제스를 만난 것은 불행이었다. 마오쩌둥도 여러 번 만났지만 그의 행·불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장징장이었지만 최후의 승자를 보는 눈은 없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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