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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이런 결혼,이런 婚需,이런 함값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봄이면 신랑 신부들이 쌍쌍이 모여든다.
결혼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다.턱시도 차림의 신랑과 웨딩 드레스를 입은 신부 한쌍이 이미 결혼식을 끝낸듯 포즈를 취한다.마치 결혼식 리허설 장면 같기도 하고 결혼 을 앞당겨 하는 결혼선불의식 같기도 하다.언제부터 이런 풍속이 생겨났는지알 수 없지만 비디오 촬영,사진 앨범 세권,대형 액자사진을 포함해 사진값만 3백여만원이 든다고 한다.
그저께 중앙일보 보도를 보면 결혼 당일의 예식비만 3천만원이들고 이런 호화 결혼식 풍습이 특정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상층에 보편적으로 일고 있다는 소식이다.
예식장 피로연 경비가 보통 2천만원이고 신부 드레스를 결혼식당일 한번 빌려 입는데 자그마치 3백만원이 든다고 한다.3천만원이라지만 예식장 빌리고 피로연 대충 하고 폐백 드리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어디 예식비 뿐이겠는가.식장비용이 이렇다면 혼수비용은 얼마나 들 것인가.오징어를 뒤집어 쓴 기괴한 모습의 신종 함진아비에게 바쳐야 할 돈은 얼마고 그들과의 피곤하고 짜증나는 신경전은 어떻게 치를 것인가.함값을 적게 줬다고 막 결혼한 신랑과 다툼끝에 신부가 자살한 것이 불과 엊그제 일이다.
그동안 잠잠했지만 80년대말과 90년대초엔 신문 사회면을 밤낮으로 장식한게 혼수 시비였다.89년이었던가.국립병원에 근무하는 朴모씨는 부인과 장모를 폭행한 죄로 구속됐다.사연인즉 결혼당시 신부쪽에서 6천5백만원 상당의 혼수를 보냈 지만 처가에서당초 약속했던 아파트를 사주지 않고 전세를 얻어줬다고 시비가 붙자 말리던 장모까지 함께 두들겨 패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해외토픽난에나 날만한 이런 시비가 당시에는 한달에 1백여건이 발생할만큼 빈번했다고 가정법률상담소는 집계했다.
딸자식 가진 부모로선 시집을 못보내 걱정이고 혼사가 정해져 시집을 가게 돼도 걱정은 쌓여갈 수밖에 없는 망국적 혼수 시비가 지금 새롭게 등장했고 보편화될 추세다.
그뿐인가.요즘 집안마다 문집 만들기가 붐이라고 한다.조상의 얼을 기리고 조상의 글을 새롭게 꾸며 자손들이 돌려가며 읽는다면 이 얼마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갸륵한 정성인가.그러나집집마다 문집이 그렇게 흔하게 보존될리 없다.이 러니 적당히 남의 문집을 도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손의 학위논문까지 집어넣어 가문을 빛내는 일에 열중하기도 한다.
이 모두 먹고 살만하니 생겨나는 과당 허위의식이다.이제 막 소득1만달러 시대에 접어들었다.가난하게 살아 잘 해보지 못한 사치를 아이들에게나마 시켜주겠다는 부모의 애틋한 소원풀이일 수있다.그러나 그것도 정도 나름이다.
당일의 결혼식 비용이 3천만원이라면 미화로 3만7천5백달러다.국민소득 2만5천달러 이상인 미국 중산층으로서도 엄두내지 못할 거금을 1만달러짜리 한국인들이 겁없이 쓰고 있는 꼴이다.
그것도 쓸만한 자리,꼭 써야 할곳에 쓰는 비용도 아니다.우리의 혼례습관에 언제부터 결혼식 리허설 기념사진을 찍는 꼴불견 풍속이 있었던가.귀하게 키운 자식을 시집보내는 부모는 가슴이 미어지는데 어째서 혼수가 적다고 사위에게 눈치보며 기죽어 살아야 하는가.사주단자를 넣어 보내는 간단한 전통 혼전의식이 어째서 현금탈취범과 다를바없는 얼굴도 모르는 함진아비에게 수백만원의 함값을 바치는 행패로 둔갑했는가.
이런 개혁,저런 개혁 따질게 없다.국민 생활과 의식이 그대로배어나는 이런 지저분하고 반(反)문화적 결혼풍속이 존속하는 한우리는 도저히 선진문화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왜 이런 몬도가네식 풍속이 생겼겠는가.누군가 돈많은 졸부(猝富)들이 이런 작태를 앞서 벌여놓았으니 업자들이 편승하고 부채질해 그게 모두 좋은 것이고 그래야만 사람대접받는줄 알고 줄줄이 줄을 서니 어느덧 이런 망국적 작태가 풍속으로 까지 자리잡지 않았겠는가.
이제 결혼시즌이다.친구가 찍어주는 간단한 결혼식장 스냅사진이얼마나 값진 추억인가.모교 운동장이나 야외 동산이면 더욱 좋다.이곳에서 부모.친지를 모시고 새롭게 출발하는 신랑 신부에게 진심으로 축복을 보내는 단출하면서도 아름다운 결 혼식 풍경이 새롭게 생겨나기를 기대해 본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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