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영원한 영웅은 없다 ‘악의 블랙홀’에 빠진 배트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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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그 출발이 만화였다는 건 잊고 보는 편이 좋다. 쫄쫄이를 입은 영웅의 호쾌한 활약과 명랑한 결말을 기대한다면 보지 않는 편이 낫다. 배트맨 시리즈의 최신작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8월 6일 개봉)는 이제까지의 수퍼히어로물과 다른 차원의 영화다. 선과 악, 영웅와 악당의 명쾌한 이분법은 혼돈으로 대체되고, 함축적인 대사에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비유와 상징이 번득인다. 아동용 만화가 아니라 그리스 고전에서 따온 듯 문학적이고 현실적인 비극이다. 그 핵심에는 주인공 배트맨(크리스찬 베일)보다 악당 조커(히스 레저)가 자리한다.

조커는 배트맨에 앞서 영화 첫머리부터 등장한다. 어릿광대 가면을 쓴 무장강도 일당이 은행에서 현금을 강탈하는데, 돈을 손에 넣기 무섭게 일당들끼리 서로 죽이도록 만드는 것이 조커의 사악함이다. 악당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점차 드러나는 그의 면모는 순수 악의 결정체, 유희적 악마에 가깝다.

조커를 연기한 배우 히스 레저는 올해 초 28세의 때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스크린에 남긴 조커에는 뜨거운 광기 대신 서늘한 귀기(鬼氣)가 감돈다. 인간적 특징이 제거된 존재라는 점에서 이 조커는 특히 섬뜩하다. 경찰이 신상을 조사하지만 본명도, 주소도, 입고 있는 옷조차 아무런 상표도 없다. 조커는 자신의 얼굴에 입꼬리가 찢어져 늘 웃는 듯 보이는 흉터가 생긴 사연을 거듭 읊조리는데, 매번 다른 사연이니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한마디로 조커는 어떻게 악당이 됐는지는커녕,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존재다. 인간적 연민을 느껴야 할 순간에 유희적 쾌감을 즐기는 존재,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짙은 어둠뿐일 것 같아 두려워지는 존재다.

그런 조커가 배트맨에게 읊조린다. “너는 나를 완성시켜.” 빛이 있어 어둠이 있듯, 조커는 배트맨에서 기인하는 한짝이라는 주장이다. 어둠을 몰아내러 빛이 등장하고, 악당을 응징하러 영웅이 출현한다는 전제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조커의 목표 역시 인간적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돈도, 세계 정복도, 심지어 배트맨의 목숨도 그가 노리는 바가 아니다. “경찰도, 갱단도 계획이 있지. 나는 그런 게 없어.” 조커는 계획의 반대말, 혼돈을 지향한다.

혼돈은 선과 악의 이분법 대신 동전을 던져 사람의 목숨을 결정하는 식으로, 불길하고 불합리한 이분법을 강요한다. 조커는 인질이 범인으로 오인되는 덫을 놓고,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남을 먼저 죽여야 하는 실험으로 고담시를 거대한 혼돈에 빠뜨린다.

배트맨은 수퍼맨·스파이더맨에 비해 전부터도 어두운 기질이었다. 그가 사는 고담시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따온 이름처럼 탐욕과 범죄로 얼룩진 가상의 도시로, 어두운 조명과 음울한 날씨가 제격이다. 놀랍게도 ‘다크 나이트’는 이에 아랑곳없이 훤한 대낮을 즐겨 배경으로 등장시킨다.

영화의 실제 촬영 장소인 시카고와 홍콩의 빌딩숲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분위기로 등장한다. 그 속에서 성실한 형사 고든(게리 올드만)을 비롯한 경찰들이 조커에 농락당하며 수렁에 빠져드는 모습은 수퍼히어로물이 아니라 사실적인 느와르 범죄물처럼 그려진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앞서 ‘배트맨 비긴즈’(2005년)에서 부유한 기업가 브루스 웨인,즉 배트맨의 어두운 내면을 탐구한 바 있다. 어린 시절 우발적인 범죄에 부모를 잃은 유복한 소년이 어떻게 스스로의 공포와 악을 이기고, 어떤 수련을 거쳤는지 내력을 담았다. 그에 이어진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이 대적해야 할 악에 대한 탐구다.

조커라는 악의 심연을 만나 배트맨은 설 자리가 크게 좁아진다. 조커의 위협에 질린 경찰들은 배트맨의 정체를 밝혀 제물로 바치고 싶어한다. 영화에는 중의적인 대사가 나온다.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 한편으로는 초법적인 영웅으로서 배트맨의 위험성을 암시하는 대사다.

경찰에 쫓기는 무법자이되, 경찰이 해결 못하는 범죄와 싸워온 배트맨이 어둠의 기사라면, 검사 하비 덴트(애런 에크하트)는 백기사, 즉 합법적인 영웅으로 등장한다. 브루스 웨인은 범죄와의 싸움에 앞장서는 하비 덴트를 후원해 그에게 영웅의 바통을 넘기려 하지만 조커의 악마성은 이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는 만화적 영웅을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의 상징으로 재해석한 점에서 놀라운 블록버스터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 관객의 열광적 반응이다. 히스 레저의 때이른 죽음이 낳은 마케팅 효과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가 경험한 혼돈이 아니라면, 어땠을까 묻고 싶어지는 대목이다.

‘다크 나이트’는 심오한 주제에 걸맞은 완성도로 대중오락의 명품을 관람하는 쾌감을 안겨준다. 캐릭터와 시나리오의 뛰어난 직조술, 대담하고도 중력감을 갖춘 액션, 일부 장면을 IMAX로 촬영한 기술적 혁신이 고루 뛰어나다.

영화의 마지막은 선과 악의 대결이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반복되리라는 슬픈 현실을 암시하며 끝난다. 배트맨은 죽어서 영웅이 되는 대신 악당을 자처하더라도 살아서 싸우는 어두운 운명을 향해 몸을 숨긴다. 애잔하다. 15세 관람가. 

글=이후남 기자,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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