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9> 지질학의 태두 웡원하오의 굴곡진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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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5월 광산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찾은 산시(陝西)성의 한 광산에서 식사하는 여공들과 담소를 나누는 웡원하오(가운데 안경 쓰지 않은 사람). [김명호 제공]

1930년대 초 교육부 차장 첸창자오(錢昌照)의 제안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가 장래를 위해서라며 요구하지도 않는 보고서를 만드느라 온밤을 새우고, 채택되지 않아도 기 죽는 법이 없으며, 평소엔 온갖 자문에 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학자들은 이제야 정부가 사람을 알아본다며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관계(官界)로 나아가면, 자신들이 연구하던 분야에 공백이 클 것을 우려했지만 그런 일은 발생치 않았다. 그러나 바라지도 않던 ‘인재내각(人才內閣)’에 징발당해 비극인지 비운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드라마를 연출한, 중국보다 해외에서 먼저 업적을 인정받은 세계적인 광물지질학자가 한 사람 있었다.

웡원하오(翁文灝)는 13세 때(1902년) 향시(鄕試)에 합격한 수재(秀才)였다. 벨기에 루뱅대에 유학해 1912년 학위를 받고 곧바로 귀국해 20년간 지질연구소에 봉직하며 그가 이뤄낸 업적은 모두 중국 최초의 것들이었다.

중국 최초의 지질학 박사였고, 최초로 광산지를 편찬했다. 전국의 지질도를 최초로 작성했고, 중국 최초의 유전인 옥문(玉門)유전도 발견했다. 1920년 깐쑤(甘肅)에 진도 8.5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 달려간 유일한 중국 학자였고, 중국 최초의 지진구획도를 작성했다. 구조지질학과 역사지질학 방면에도 공헌이 컸다.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출토된 베이징원인도 신생물연구소를 주도할 때 이뤄낸 업적 중 하나였다.

땅 위에서 기상천외한 일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던 시대였다. 중국인의 생활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어떤 물건들이 땅속에 있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을 때였다.

1932년 여름 첸창자오는 장제스에게 웡원하오를 데리고 갔다. 웡은 중국 전역에 산재한 광산자원의 종류와 매장량을 설명했다. 내륙에 중공업기지 건설도 가능하다고 했다.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장제스는 3일 동안 웡원하오의 말을 경청했다. 시종일관 덕(德)과 재(才)를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먼저 반성하겠다. 인재들을 찾아내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국방설계위원회 비서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웡은 거듭 사양하고 지질연구소로 돌아왔다.

다음해 정부는 웡원하오의 교육부장 임명을 발표했다. 웡은 계모의 상을 치러야 한다며 거절했다. 6개월간 부장이 공석이었지만 그는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칭화대 학생들이 총장을 내쫓았을 때 후임에 임명됐지만 학교가 안정을 되찾자 3개월 만에 사직했다. 중앙연구원 원장 선출투표에서 후스(胡適)보다 많은 표를 얻었을 때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없었고, 취임을 사양했을 때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웡원하오는 학술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했다. 1934년 설날 무렵 저장성에서 교통사고로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석유 탐사 중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라고 신문마다 대서특필했다. 가족들은 뒷일을 준비했지만 장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의료팀을 조직하게 했고, 저장성 주석을 병원에 상주시켰다.

일 년 후 장제스는 웡원하오를 행정원 비서장에 임명했다. 웡은 평소 장제스의 ‘불치하문(不恥下問)’과 ‘예현하사(禮賢下士)’하는 태도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교통사고 이후 장은 ‘생명의 은인’으로 웡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웡은 서재(書齋)를 떠났다. 그의 정계 진출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13년간 실업부장, 재정부장, 자원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48년엔 내각 수반인 행정원장이 되었다. 국민당 몰락의 계기가 된 금원권 화폐 개혁이 실패하자 사직했다. 장제스는 아들 장징궈를 보내 만류했지만 두문불출하며 만나지 않았다.

공직에서 물러난 웡원하오는 유럽행을 택했다. 중공이 전범 명단을 발표했다. 여덟 번째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미국의 여러 연구기관에서 고액 연봉을 제의했고, 타이완의 국민정부는 귀국을 재촉했다. 웡원하오는 제3의 길을 택했다.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국에 돌아가 무슨 일이건 다하겠다. 그러나 장제스에 대한 비판만은 강요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중공은 두말없이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1951년 귀국한 웡원하오는 번역과 연구활동에만 전념했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했을 때도 철저한 보호를 받다가 1971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애국자(愛國者)’라는 말로 그의 일생을 정리해 주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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