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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 寫樂)라는 화가가 배우의 대형 초상화로 지금의 도쿄 자리인 에도(江戶)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1794년 5월이었는데 그 이듬해 정월까지 무려 1백50점 가까운 걸작 그림을 잇따라 그려내고는 별안간 사라졌 어요.1794년엔 윤달이 끼어 11월이 두달이나 있었기 때문에 꼭 10개월이 되는 셈이지요.열달동안에 1백50점.대단한 정력이에요.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도 대단히 정력적으로 창작생활을 한 것같은데 이 10개월 사이엔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으니 참 묘한 합치가 아닙니까?그런데 일본에서 도슈사이가 종적을 감춘 다음달인 2월부터 단원은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고 있네요.』 『어디,좀 보여 주십시오.』 아버지가 책자를 받아 단원의 약력을 읽어 내려갔다.
『1794년 갑인(甲寅) 50세 정조(正祖)18년-연풍(延豊)현감이었다.그해 연풍은 크게 가물어 재해지역으로 분류됐다.6월22일 정조는 변광복(卞光復)의 재주와 기품이 김홍도에 버금가니 시험 없이 화원(화員)으로 채용하라고 지시했 다.
1795년 을묘(乙卯) 51세 정조 19년-정월4일,호서(湖西) 위유사(慰諭使) 홍대협(洪大協)이 김홍도는 중매나 일삼고하급 관리를 괴롭히며 사냥을 빌미삼아 세금을 거두는 등 백성을혹독히 다룬다고 보고했다.7일,정조는 연풍현감 을 교체하라고 구두로 발령냈다.8일,홍대협이 파직된 김홍도를 의금부(義禁府)에서 엄벌할 것을 주장하여 윤허를 받았다.18일,정조는 김홍도등 미처 잡아오지 못한 죄인을 사면해 주라는 단자를 내려보냈다.2월28일,김홍도를 병조(兵曹)의 군직(軍職)에 부치게 하여상근토록 하면서 정조의 돌아간 아버지 사도세자와 생모 혜경궁 홍씨의 동년 회갑잔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아,그 그림이유명한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병풍이군요.』 아리영이 고개를끄덕였다.
『그나저나 정말 이상한데요.이 약력에 의하면 연풍은 1793년에도 기근이 들어 현감인 김홍도는 나라에서 내린 기근용 곡식에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재량껏 곡식을 마련하여 죽을 끓여 굶주린 백성을 살렸다고 돼 있어요.이렇게 자상하고 살뜰한 현감이그 이듬해 계속 큰 기근이 들었는데 「중매나 일삼고 하급 관리를 괴롭히며 사냥을 빌미로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같군요.백성이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판국에 무슨 세금을 거둘 수 있었겠 습니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혹시….』 이자벨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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