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총장 체포 거사전 수차례 모의-12.12밝혀진 사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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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2.12및 5.18사건 2차공판에선▶전두환(全斗煥)당시 보안사령관이 거사전 측근장성들과 정승화(鄭昇和)계엄사령관 체포를수차례 모의▶全씨를 중심으로한 「6인위」가 12.12전 군(軍)요직인선을 마쳤다는 내용을 비롯,새로운 사실들 이 몇가지 밝혀졌다. 검찰과 피고인의 법정공방을 통해 당시 신군부측은 정승화총장을 「포스트 박정희(朴正熙)」를 노리는 야심많은 실력자로인식하고 있었고 鄭총장 연행에 대해 최규하(崔圭夏)대통령은 처음 단호히 재가를 거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鄭총장 당시 위상=全씨는 이날 정승화총장에 대해 『박대통령이 시해된뒤 계엄사령관인 鄭총장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鄭총장을 평가했다.全씨는 79년11월 鄭총장 연행계획을 공개 거론하지 않았느냐는 검찰 질문에 대해서도 『당 시 朴대통령보다 권력이 센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 사람을 의심한다는 사실이알려지면 살아 남았겠습니까』고 반문했다.
◇鄭총장의 유신체제 부정=황영시(黃永時)씨는 鄭총장이 79년11월 육본에서 열린 계엄확대회의에서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鄭총장은 당시 『10.26사건은 불행한 사건이나 국가적으로는불행한 일이 아니며 유신체제는 잘못된 것』이라는 발언을 해 黃씨가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고 진술했다.
◇崔대통령의 재가 거부=검찰수사과정에서 崔대통령은 유학성(兪學聖)군수차관보가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혼란이 가중된다』며 재가를 다그치자 『조용한데 무슨 불상사요.잠잠하기만 한데』고 단호히 거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崔대통령은 신군 부의 위협으로 결국 재가서에 결재하면서 「05:10AM」이라고 시간을 표기,우여곡절끝에 새벽에야 재가가 이뤄졌음을 기록하려 했다는 것이다.崔대통령은 또 신현확(申鉉碻)국무총리에게 『鄭총장 연행이 불법이라고 생각했지만 국방장관의정식 결재를 거쳤다는 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후결재했다』고술회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정희대통령 비자금 처리=전두환씨는 합수부측이 10.26사건을 수사하면서 金계원비서실장 방에서 발견한 비자금중 일부는 정승화총장에게 건네졌다고 진술했다.
全씨는 『금고에서 발견한 9억원을 큰딸 근혜씨에게 줬는데 6억원을 제외한 3억원을 보내와 1억원은 수사비로 쓰고 2억원은鄭총장에게 건네줬다』고 말했다.
全씨는 『건넨 2억원의 행방은 모른다』며 鄭총장이 사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며 『당시 노재현(盧載鉉)국방장관에게도 일부인 5천만원을 줬다』고 밝혔다.
◇전두환씨 국회청문회 위증=全씨가 89년11월 국회청문회에서『노태우.황영시씨와 접촉해 군 개혁방안에 대해 논의했다』는 증언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全씨는 79년11월30일 황영시씨의 소개로 김윤호 광주보병학교장과 만나 『군 상층부를 퇴진시키고 정규육사 출신들로 재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당시 국회증언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경복궁모임 장소는 원래 보안사=全씨는 거사 당일 신군부측모임을 보안사령부에서 가지려 했으나 나중에 30경비단으로 바꾼것으로 밝혀졌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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