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國 최고의 미남이 ‘漢奸의 길’을 걷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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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34면

1943년 일본군 부대를 시찰하는 왕징웨이. 왕은 군복 입기를 좋아했다. 김명호 제공

왕징웨이(汪精衛)는 가는 곳마다 미남 소리를 달고 다녔다. 그것도 그냥 미남이 아닌 민국(民國) 최고의 미남이었다. 장쉐량(張學良)·후스(胡適)·저우언라이(周恩來)·추안핑(儲安平)·왕정팅(王正廷) 등도 미남 소리를 들었지만 왕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1>

1918년 가을 시인 쉬즈뭐(徐志摩)는 후스와 함께 항저우 근처에서 10여 일을 보냈다. 후스가 옛날 애인을 만나기 위해 꾸민 여행이었다. 별 생각 없이 따라나섰던 쉬즈뭐는 며칠 지나서야 부인을 무서워하는 후스에게 감쪽같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헛걸음은 아니었다. 친구의 소개로 왕징웨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소년 시절 왕의 옥중시(詩)를 좋아하던 쉬즈뭐는 감격했다. 10월 1일 일기에 “그는 정말 미남자였다. 사랑스러웠다”고 적었다. 후스도 “그가 만일 여자였다면 그를 위해 목숨이라도 걸었을 텐데, 남자인 게 아쉽다. 그래도 사랑스럽다”고 했다. 당시 왕징웨이는 대원수부 비서장이었다. 쉬는 그래도 뭔가 부족했던지 “왕징웨이는 눈이 살아 있었다. 검다 못해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의 눈에는 협기가 있었다. 우리가 시를 노래하자 그도 시를 지었다. 주량도 대단했다”고 추가로 적었다. 이날 이들의 만남은 즐거웠지만 헤어져 돌아가는 길은 한결같이 발걸음이 무거웠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왕징웨이는 꼭 망가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날의 불길한 예감은 20년 후에 적중했다.

1937년 1월 장제스(蔣介石)가 항일전쟁을 선포하자 중국군은 일본군과 혈전에 돌입했다. 왕징웨이는 공개석상에서 “이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다. 화평에 실패하면 중국은 대란이 온다”며 항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다녔다.

일본군이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한 후 무고한 양민 30여만 명을 학살했을 때도 “만약 일본이 제시한 화의 조건이 중국의 생존에 지장이 없다면 접수해야 한다”고 했다. 전 국민의 항일 열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을 때였다. 시인묵객이 술 한잔 마신 김에 내뱉는 말이라면 몰라도 왕징웨이는 국방최고회의 주석에 국민당 부총재였다. 일국의 지도자급 인물이라면 똑같은 말이라도 해야 할 때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왕징웨이는 일본과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다. 만족할 만한 보장을 받자 전시 수도 총칭을 떠났다. 쿤밍을 거쳐 월남의 하노이에 도착했다. 하노이에 집결해 있던 한간(漢奸)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일본 정부는 “항일을 주장하는 국민정부를 철저히 격멸하고, 새로 탄생하는 정권과 제휴해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건설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극비리에 일본을 방문한 왕징웨이는 난징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완전한 투항이었다.

왕징웨이는 군사(軍事)나 전쟁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었지만 군대가 없는 정권은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육군과 해군을 창설했다. 왕징웨이의 군대는 특징이 있었다. 국민당군과는 전투를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한간’이 왕징웨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중국인은 없지만 역사적인 평가는 가끔 변덕을 부릴 때가 있다. 앞으로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그러나 ‘민국 최고의 미남’이라는 말이 왕징웨이의 이름 앞에서 사라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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