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 좇다 망신 당한 ‘리딩뱅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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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지주회사 설립을 추진 중인 국민은행이 당초 공시 내용과 달리 ‘조건부 지주회사 전환’ 방침을 발표해 논란이 되고 있다. 공시 번복으로 지주회사 전환은 무산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고, 이를 계기로 투자금 회수 등을 계획했던 투자자들은 피해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는 “리딩뱅크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국민은행 경영진의 무원칙한 경영을 비난하고 있다.


7월 15일 국민은행은 지주회사 전환 조건으로 ‘발행 주식 수의 15% 이하 반대’라는 단서 조항을 발표했다.

즉 지주회사 전환에 반대하는 주주들의 주식(주식매수청구권)이 발행 주식 수의 15%를 넘을 경우 지주회사 전환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4월 국민은행이 공시했던 지주회사 주식교환에는 없던 내용이다.

현행법상 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주주총회 출석 주식의 3분의 2 이상, 발행주식 수의 3분의 1 이상이 찬성하면 된다. 즉 반대 주식 비율이 30%가량 돼도 지주회사 전환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민은행이 ‘상한선 15%’란 카드를 내놓은 것은 막대한 지주회사 전환 비용이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은 지난 4월 지주회사 전환을 결정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주주들의 주식을 주당 6만3293원(교환가격)에 사주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민은행 주가는 6만9200원으로 교환가격보다 높아 부담이 없었지만 최근 증시가 급락하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7월 17일 현재 국민은행 주가는 5만2500원. 교환가격보다 무려 17% 낮은 수준이다.

주가 낮아 지주사 전환 불투명

주주들 입장에서는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 차익을 챙기는 것이 더 좋은 상황이 된 것이다.

차익을 노리고 주주들이 대거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다면 국민은행은 지주회사 전환을 위해 최대 7조원이 넘는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 이 경우 국민은행의 재무건전성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실제 지주회사 전환에 반대하는 주식이 30%일 경우 7조5580억원(자사주 포함)의 비용이 소모되며 이에 따라 국민은행의 BIS비율은 위험수준인 8%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은행으로서는 지주회사 전환이라는 ‘명분’보다는 재무건전성이라는 ‘실리’를 택한 셈이다.

국민은행은 ‘상한선 15%’ 카드를 통해 자금부담 문제가 해소되면 지주회사 전환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증시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국민은행의 주가가 교환가격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는 한 지주회사 전환은 힘들다는 분석이다. 현 주가와 교환가격 간 괴리가 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는 반대 주주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소액주주 중에서는 지난 4월 이후 국민은행 주가가 급락하자 이를 기회로 무위험 차익거래(투자위험 없이 주식교환을 통해 차익을 챙기는 거래)에 나선 투자자도 많은 상태다.

김은갑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향후 주식시장의 상황과 국민은행의 자사주 매입 여부 및 매입 규모에 지주사 전환 여부가 달려 있다”며 “증시가 호전되지 않아 주가가 기존 매수청구가격(교환 가격)을 크게 하회할 경우 지주회사 전환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식시장에서는 “국민은행이 지주회사 전환을 연기하기 위해 조건부 전환 방침을 내세운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조건부 지주회사 전환은 주가 하락을 부추겨 오히려 지주회사 전환 가능성을 더욱 희박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7월 15일 조건부 지주회사 전환 발표 이후 4일간 국민은행의 주가는 7% 이상 급락했다.

이창욱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국민은행이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억제하기 위한 승부수로 판단한 방안이 오히려 주가급락이라는 역효과로 나타나며 지주회사 전환 가능성을 낮추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사 연구원은 “조건부 전환은 사실상 자금부담으로 지주회사 전환을 연기하기 위한 방편”이라며 “(국민은행이) 지주회사 전환을 아예 백지화하는 것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을 낮추는 차선책을 쓴 것 같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국민은행 고위관계자는 “지주회사 전환은 국민은행과 자회사들의 경영 효율 및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인데 주가 급락으로 오히려 회사에 해를 끼치는 상황이 됐다. 이 점을 우려해 조건부 지주회사 전환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지주회사 전환 연기가 불가피했음을 시인했다.

국민은행의 지주회사 전환이 무산될 것으로 전망되자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원성이 커지고 있다. 지주회사 전환이 무산되면 주식교환은 자동으로 폐지되고, 투자자금을 회수하려던 투자자들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투자자인 김 모씨는 “증시도 안 좋고, 집안 일로 돈도 필요해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결심했다”며 “하지만 국민은행이 갑작스럽게 조건부 전환을 발표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해외시장에선 상상도 못할 일”

또 다른 투자자도 “증시 침체로 자금부담이 커졌다곤 하지만 그 정도도 예상 못하고 주주의 마땅한 권리인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제한하는 국민은행 경영진의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증시 전문가들도 국민은행의 조건부 지주회사 전환은 투자자 신뢰 저하, 대외 인지도 하락 등 문제 소지가 많다는 지적이다. 국민은행은 국내 상장사 중 시가총액 5위인 국내 대표 주식일 뿐만 아니라 뉴욕증시 상장사, 세계 100대 은행(56위)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금융기관이기도 하다.

증권사 한 CEO는 “사정이 어떻든 국민은행의 이번 결정은 투자자와의 약속을 번복한 것으로 해외시장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금융기관은 신뢰와 이미지가 중요한데 상황에 따라 원칙을 뒤바꾼다는 것은 투자자, 특히 외국 투자자들에게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말했다. 실제 7월 15일 국민은행이 조건부 전환을 발표한 이후 이틀간 외국인들은 200만 주가 넘는 주식을 내다 팔았다.

이창욱 연구원도 “지주회사 전환이 무산되면 투자자 신뢰 저하, 조직 내부의 혼란 등이 예상된다”며 국민은행 투자의견을 기존 ‘매수’에서 ‘보유’로, 목표주가는 9만7000원에서 6만5000원으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국민은행 내부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국민은행 한 사외이사는 “불가피한 결정이었지만 대내외적으로 공신력을 잃는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며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가 주식매수청구권 등 관련 제도를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투자자들의 피해가 예상되지만 법적으로 보상받을 길은 없는 상태다. 금융감독원은 국민은행의 이번 결정에 공시규정 위반 등 법적인 문제는 없다는 해석이다.

금융감독원 기업공시국 관계자는 “피해를 보는 투자자가 있을 수 있지만 국민은행 경영진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변화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고 판단한다”며 “증권 관련 집단소송 대상도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결정으로 국민은행의 지주회사 전환이 무산되면 재추진까지는 최소 7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증시 상황에 따라 최악의 경우 국민은행 투자자들은 7개월간 자금회수를 기다리거나 손해보고 주식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임상연 기자 sy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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