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기쁨과 소비의 쾌락이 섞일 때 관능이…-‘노킹 온 헤븐스 도어’(토머스 얀·1997년)의 테킬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2호 07면

독주를 뜻하는 영어 ‘스피릿(spirit)’은 알코올 도수 35도 이상에 설탕을 첨가하지 않은 증류주를 일컫는다. 여기엔 위스키·럼·진·보드카·테킬라·브랜디·고량주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럼, 이 가운데 그냥 스트레이트로 먹기에 가장 맛있는 술은 뭘까. 취향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맛으로만 친다면 테킬라 아닐까.

임범의 시네 알코올

마시기 전에는 도무지 음식에서 날 것 같지 않은 이상한 풀 냄새, 기름 냄새 같은 게 술과 나 사이에서 겉도는 것 같다. 그게 목구멍을 넘어간 뒤에 남기는 진득한 잔향은 희한하게도 몸에 딱 달라붙는 느낌이다. 여느 스피릿보다 목 넘길 때의 식감이 걸쭉하고, 마치 접착력이라도 있는 듯 이내 다음 잔을 부른다. 스피릿 가운데 보드카가 ‘지리’라면 테킬라는 ‘탕’이다. 취기가 전해지는 속도도 빠르다.

수년 전 집에서 형과 함께 ‘노킹 온 헤븐스 도어’(토머스 얀 감독·1997년)라는 독일 영화를 비디오점에서 빌려 봤다.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젊은 남자 둘이 한 병실에 입원하게 됐다. 한 남자가 말한다. “내 머릿속에 주먹만 한 종양이 있대. 며칠 못 산대.” 다른 남자가 말한다. “나는 골수암 말기래.” 짠하다. 병실 벽에 걸려 있던 십자가도 짠했는지, 갑자기 냉장고 위로 툭 떨어지고 냉장고 문이 열린다. 그 안에 선물처럼 술병이 하나 들어 있다. 테킬라가!

둘은 술병을 들고 병원 구내식당으로 간다. 식당 냉장고를 뒤져 레몬과 소금을 찾아낸다. 테킬라를 마신다. 이때 형과 나는 비디오를 중지시켰다. 아쉽게도 집엔 테킬라와 레몬이 없었다. 대신 소주와 귤과 소금을 가져와선 텔레비전 앞에 놓고 다시 비디오를 틀었다.

영화 속 남자들의 대화. “난 아직 바다를 보지 못했는데.” “바다를 못 봤다고? 천국에서는 사람들이 허구한 날 바다로 해가 지는 광경만 얘기한데. 그때 넌 어떻게 대화에 낄래?” 그러면서 테킬라 한 병이 비워진다.

둘은 환자복 차림으로 병원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훔쳐 타고 바다를 향해 출발한다. 테킬라와 레몬 대신 소주와 귤을 먹은 형과 나는 아무 데로도 출발하지 못하고 영화가 끝난 뒤 그냥 잤다.

테킬라는 위험하다. 모든 술이 많이 마시면 안 좋고 더 안 좋으면 사고 치게도 만들지만, 테킬라가 주는 취기는 ‘꼬장’이나 객기와 조금 달리 뭔가를 능동적으로 하고 싶게 만든다. 누군가가 그랬다. 창조에 수반되는 게 기쁨이고, 쾌락은 소비할 때 생기며, 이 둘이 섞인 게 관능이라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테킬라는 관능적이다. 시한부 삶의 운명에 좌절한 젊은이들로 하여금 바다의 석양을 찾아 나서게 만들 술로, 테킬라만 한 게 또 있을까.

테킬라의 이런 관능은 어디서 오는 걸까. 위스키나 브랜디에 비해 테킬라는 증류한 뒤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 기간이 길지 않다. 2006년 이후부터 제도화된 ‘엑스트라 아네호’라는, 2006년에 새로 첨가된 딱지가 붙은 최상품의 숙성 기간이 3년이다. 대부분은 증류한 뒤 바로 마시거나(블랑코), 두 달 숙성시키거나(레포사도), 일 년 숙성시킨다(아네호).

그러나 위스키나 브랜디의 원료인 곡물이나 과일이 일 년마다 열리는 것과 달리, 테킬라는 원료가 되는 식물 아가베(용설란)를 8~12년 동안 땅에서 키운 뒤 재배한다. 아스텍 문명을 낳은 멕시코 중앙고원의 뜨거운 햇볕 아래 원료 자체가 긴 세월 동안 숙성되는 셈이다.

테킬라는 또 아스텍과 서구, 두 문명의 결합으로 탄생한 400년 역사의 유서 깊은 술이기도 하다. 충분히 키운 용설란, 아가베의 잎을 잘라 내고 남은 지름 70~90㎝의 파인애플같이 생긴 몸통을 찌고 그 과정에서 생긴 당분으로 발효시킨 뒤 증류한 게 테킬라인데, 증류하기 전 상태의 막걸리처럼 걸쭉한 술을 ‘풀케’라고 부른다. 이걸 16세기 이전에 아스텍인들이 마셨다고 한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이곳을 점령한 뒤 그들의 증류 기술을 동원해 풀케를 증류하기 시작했고, 1600년을 전후해 테킬라를 만드는 공장이 생겼다고 한다.

영화로 돌아오면, 이제 중요한 건 두 주인공이 바다로 가느냐 가지 못하느냐다. 출발하고 보니 돈이 없다. 마침 훔친 차(연두색 벤츠)가 조폭의 차여서 그 안에 권총이 있었다. 은행을 턴다. 경찰이 쫓아오고 도망가면서 보니 차 트렁크 안에 수억원이 든 돈 가방이 있었다. 그러니 조폭까지 쫓아오지만, 주인공들에겐 또 다른 숙제가 생겼다. 죽기 전까지 그 큰돈을 쓰는 것.

이런 구도는 틀을 짜 놓고 상황과 설정을 맞춰 가는 기획영화에 가까운데, 중간 중간에 짠한 대목이 있다. 돈 가방을 발견한 뒤 둘은 각자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적는데 한 명의 것이 이렇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광팬이었던 어머니에게 엘비스가 타던 분홍색 캐딜락을 사 주는 것. 멀쩡할 때 이런 떼돈이 생겼더라도 어머니를 맨 먼저 떠올릴까. 갑자기 등장한 ‘어머니’라는 말은, 주인공이 곧 죽을 운명임을 다시 한번, 좀 더 실감나게 떠올리게끔 만든다.

많이 웃기는 대목도 있다. 주인공을 추격하는 조폭 두 명의 대화. “의사가 살펴보니 환자의 고환이 이상한 거야. 하나는 나무이고 하나는 쇠야. 그래서 물었지. 자식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환자 왈, 둘 있습니다. 하나는 피노키오이고 하나는 터미네이터입니다.” “그게 끝이야?” “뭐가 더 필요한데? 안 웃겨?” “피노키오가 누군데?”
우여곡절 끝에 두 주인공은 바닷가에 도착해 다시 테킬라를 마신다. 여기서 테킬라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냥 술일 뿐이고, 둘의 술 마시는 행위도 하나의 제의처럼 보인다. 이들은 거기서 삶이 남아 있는 동안 해야 할 뭔가 또 다른 목표를 찾게 될까. 영화는 답 없이 착잡하게 끝난다. “그게 끝이야?” “뭐가 더 필요한데?”

테킬라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한 가지. 바로 벌레다. 수년 전부터 테킬라 제조에 관한 규정은 테킬라에 벌레를 넣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벌레가 들어가는 술이 있다. ‘메즈칼(mezcal)’이라는 멕시코 술이다. 메즈칼은 현지 말로 아가베를 뜻한다.

아가베, 즉 용설란으로 만든 술을 통칭해 메즈칼이라고 부르며, 그 가운데 테킬라라는 마을이 속해 있는 멕시코 할리스코주에서 아가베의 여러 종류 중 ‘블루 아가베’로 만든 메즈칼을 테킬라라고 부른다. 브랜디 가운데 코냑 지방에서 나는 것만 코냑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더 유명해져 코냑이라는 말이 브랜디를 대체하고 있는 것과 같다.

최근의 기사들을 보면 테킬라는 대량 생산되면서 첨가물도 많이 들어가는 데 반해 메즈칼은 전통에 따라 수공업으로 소량씩 제조돼 테킬라보다 품질이 더 낫다고 한다(규정에 따른 아가베 원액 함량도 테킬라는 51% 이상임에 반해 메즈칼은 80% 이상이다). 메즈칼에 벌레를 넣으면 향기가 풍부해진다는 설도 있고, 그냥 상술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다.



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