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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 투자 환영 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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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얼마 전 경제부총리와 한은 총재가 잇따라 "경기가 회복세로 들어설 것"이란 발언을 했다. 수치만 놓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나라 경제의 성적표라 할 수 있는 성장률은 올해 당초 한은이 전망했던 5.2%보다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내용이다. 지금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수출이 이끌고 있다. 1분기 수출증가율은 38.9%에 달했다. 중국(29%)보다도 높았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 반도체.자동차.휴대전화.컴퓨터.선박 등 5대 품목이 1분기 수출의 45%를 차지했다. 또 수출을 제외하곤 잘 되는 게 없다. 내수나 투자는 여전히 어렵다. 이러다 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경기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은행들은 요즘 중소기업엔 돈을 잘 빌려주지도 않는다.

외환위기 때는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수치도 안 좋아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국민적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치만 보다 보면 착시 현상에 빠지기 딱 좋게 돼 있다.

정부는 내수 부양을 위해 지난달 특소세를 인하했다. 하지만 결과는 별무신통이다. 민간에선 '재고 땡처리'다 뭐다 해서 50% 세일은 다반사다. 그래도 안 팔린다. 하물며 수천만원짜리 차를 사는 데 정부가 특소세를 내려 값을 20만~30만원 낮춰줬다고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실업이 심각해지니까 정부는 기업이 신규채용하면 법인세를 1인당 연간 100만원 깎아주는 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연봉 2000만~3000만원을 줘야 하는데 그 정도 세금 덜 낸다고 고용을 팍팍 늘릴 것으로 생각했다면 역시 오산이다.

내수 부진, 청년 실업, 경기 양극화 등 우리 경제의 문제점은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근본적인 해결은 미뤄진 채 몇 해가 흘러왔다. 정부는 세금 좀 깎아주는 것을 정책이라고 내놓고 "일했다"고 자위하지 말고,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천착했으면 한다.

내수 부진의 큰 원인 중 하나가 400만명에 육박하는 신용불량자 문제다. 빚도 못 갚는데 어떻게 소비를 하나. 그렇다고 원리금 탕감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요즘엔 과소비 때문이 아니라 '벌이는 없는데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해야 해 카드를 긁는' 생계형 신불자가 많다. 신불자 문제 해결의 제1조는 당사자들이 자생력을 갖도록 하는 것, 즉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고용의 주체인 기업들은 투자를 안 한다. 1분기에 30대그룹의 투자집행률은 16%였다. 당초 계획했던 올해 투자의 16%만 한 것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기업들의 현금 보유율은 사상 최고 수준이다. 불안하니까 투자를 안 하는 것이다.

최근 현대.기아차 그룹이 슬로바키아에 공장을 짓기로 하자 그 나라 대통령이 특별지시해 대통령궁 앞에서 5일간 '기아차 페스티벌'이란 국민 축제를 열었다. 부총리는 자기 이름에 '현대'자를 넣겠다고까지 했다. 이런 나라라면 기업들이 안심하고 뛰어들지 않겠는가. 세제 혜택, 금융지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마인드가 무서운 것이다.

정부는 무엇보다 시장원리만 지키면 사업을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민간에 줘야 한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안 맞는, 즉 선진국엔 없는 규제는 싹 없애야 한다. 세제.금융 지원대책 만들기에 앞서 이런 작업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기업들도 과거 선배들이 이뤘던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그래야 불황을 헤치고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다. 선거가 끝난 지금, 국정 제1의 목표는 국민이 안심하고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돼야 한다. 이젠 경제다.

민병관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