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채운 ‘12년간의 존재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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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시장은 온전히 개념에만 지배되고 있다. 붓터치나 자필서명 등 작가 몸에서 나온 흔적은 없다. 온 카와라가 12년간 만든 기록을 인쇄한 한정판 책만 죽 늘어놓았다. [두아트 서울 제공]

“1968년 8월 3일, 나는 오전 10시 49분에 일어났다.”

온 카와라(당시 36세)는 자기가 머물고 있는 멕시코의 몬테카를로 호텔에서 뉴욕의 친구에게 이렇게 달랑 한 줄이 적힌 엽서를 보냈다.

“히로코 히로오카, 에드 맥아들, 해리 림프만”

1970년 6월 8일 하루를 마치며 온 카와라는 이렇게 메모했다.

서울 사간동 두아트 서울에서는 개념 미술의 거장 온 카와라(76)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린다. 전시장은 황량하다. 벽에 걸려 있어야 할 그림이나 사진, 공간을 채우는 조각은 전혀 없다. 여러 권의 책들과 이를 펼쳐볼 때 낄 흰 장갑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은 1968년 5월 10일부터 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만나 대화를 나눈 이들의 이름을 매일 기록한 ‘나는 만났다(I MET)’, 매일 기상시간을 도장 찍어 엽서로 보낸 ‘나는 일어났다(I GOT UP)’, 매일 이동한 경로를 지도 위에 선으로 그은 ‘나는 갔다(I WENT)’ 시리즈다. 기록한 내용을 인쇄해 한 해씩 묶은 12권의 책, 총 36권이 전시장에 고이 놓여있다. 그가 매일 몇 시에 일어나 누구를 만났는지 궁금해 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 중요한 건 이 작가가 12년간 매일 진득하게 이 작업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책들은 그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1960년대 들어 서구 미술계에서는 그리거나 조각하는 대신 도표나 사진·기사·기록물 등을 제시하며 작가의 아이디어를 강조하는 개념미술이 나타났다. 온 카와라는 일본 출신으로는 드물게 개념 미술의 거장 반열에 올랐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66년 1월 4일부터 현재까지 날마다 캔버스에 그날의 날짜를 적는 ‘날짜 그림’이다.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않았다.

개념만이 지배하는 이 허전한 전시장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방이 딱 하나 있다. 과거 100만년(998031BC∼1969AD)과 미래 100만년(1993∼1001992AD)의 숫자를 타이핑한 두 권의 책(‘100만년’)이 놓인 1층이다. 과거편은 ‘그동안 살다가 죽은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미래편은 ‘마지막 생존자를 위하여’라는 헌사로 시작된다. 책의 숫자를 나직이 읽어나가는 남녀 성우들의 목소리가 울리는데, 24시간 쉬지 않고 읽으면 책 한 권에 한 달씩 걸린다고 한다. 이 장구한 세월 동안 내가 이 우주에 머문 것은 한 순간일 뿐이다. 전시는 개막 한 달 뒤인 다음달 24일까지다. 02-2287-3500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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