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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 TV 속으로 … "내 끼 좀 봐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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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때요, 연예인보다 못할 것 없죠? 표정이면 표정, 율동이면 율동." SBS ‘최수종쇼’에 출연한 상명대 유나령.윤미진양, 중앙대 이정환.구혜영.이예범씨(오른쪽부터). [최승식 기자]

지난 12일 오후 홍대 앞 노래방. TV 화면엔 온통 머리카락뿐이다. 영화 '링'을 연상케 하는 장면. 그 순간 "Baby, look at me…." 머리카락을 헤치고 남자 두 명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나오며 노래 '페임'이 시작된다.

구혜영(25)씨가 스테이지를 휘젓는 동안 백댄서 남성들은 발차기를 하고 날갯짓을 하는 등 분주하다. 중앙대 조소학과에 다니는 이들(팀명 '폐인')이 이날 도전한 곳은 SBS '최수종쇼-기쁜우리 노래방'. 일반인들이 춤과 노래로 연예인팀과 일합을 겨루는 자리다. "평소에도 이렇게 놀아요." 카메라 앞에서도 긴장하거나 떠는 기색이 없다. "오늘도 교수님께 방송 때문에 수업에 빠진다고 당당히(◆ )얘기하고 나왔어요"라며 천연덕스럽게 받는다. 그렇다면 연예인 지망생◆ "아니에요. 조각가의 길을 가야죠. 하지만 '끼'에 장르가 따로 있나요◆ " 그렇다. 이제 TV는 연예인이나 전문방송인만의 것이 아니다. 방송사마다 앞다퉈 '시청자 주권'을 내세우고, 시청자들도 TV를 끼를 발산하는 창구로 삼으면서 일반인이 브라운관을 누비는 경우가 늘었다. 진정한 시청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반짝유행에 불과한가.

◆ MC도 시청자 입맛에 맞아야="엄마, 못 알아들으셨셈." "'못 알아들으셨어요'라고 해야지." 13일 MBC 마당 벤치. 윤희경(40)씨와 딸 박민정(13)양의 대화다. 엄마가 딸과 인터넷 채팅을 하면서 잘못된 우리말 표현을 고쳐주고 있다. 그리고 이날 대화는 조만간 '우리말 나들이'를 통해 방송된다. 윤씨는 MBC가 처음으로 선정한 '시청자 우리말 지킴이' 중 한명이다.

이렇게 시청자들은 어느새 방송 깊숙이 들어와 있다. 과거 퀴즈나 노래 경연, 휴먼 다큐에서나 등장하던 양상과 다르다. 시청자 사연을 토대로 극을 꾸미는 건 기본이고, 시청자가 찍은 작품들도 속속 전파를 탄다. '전파견문록''누구누구'(MBC), '스펀지''TV는 사랑을 싣고'(KBS), '최수종쇼''서바이벌 창과 방패'(SBS) …등 일반인과 연예인이 함께 출연하는 것도 대세다. 지난달에는 MBC '대장금'이 시청자 배우를 공모해 금단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정통 드라마의 문도 열렸다. KBS 홈페이지에서 시청자 참여를 표방한 프로그램은 얼핏 추려도 20개에 달한다.

봄 개편을 앞두고 선보인 파일롯 프로그램(시청자의 반응을 알기위해 시험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서도 KBS는 시청자들이 직접 출연하는 시트콤을, MBC는 일반인이 패널로 참여하는 토크 프로까지 마련했다. KBS는 다음달 'MC 서바이벌' 이란 특집도 방영한다. 예심을 거친 오락 MC 지망자들이 6주 동안 장기를 보이고 시청자의 전화 투표로 한명씩 탈락시키는 방식이다.

◆ 케이블.위성은 '쌍방향 홍수'=JEI재능방송이 16일 신설하는 '도전! 매직키즈'. 아이들이 직접 프로그램에 참여해 마술을 배우고 배운 마술로 경연을 벌인다.

이런 식으로 시청자를 방송 안으로 끌어들인 프로그램은 케이블.위성에서만 20개 이상. 푸드채널은 네명의 전문직 남성들이 요리와 토크를 선보이는 '4mens' 블루노트'를 방송 중이다. MTV코리아의 '익사이팅 스튜디오'에선 시청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와 데이트를 즐기고, 채널V코리아 '와글와글 문자세상'에선 진행자와 시청자가 메신저를 이용해 대화를 한다. 길거리공연을 시작한 m-net의 '뮤직타워'처럼 시청자를 찾아가는 프로그램도 덩달아 호황이다.

◆ 아직 갈길 먼 '시청자 주권'=이런 경향은 과거처럼 시청자의 권익을 무시할 수 없게 된 시대적 분위기가 가장 큰 이유다. 엽서나 전화를 통해서만 의견표출을 했던 시청자들이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공영성을 확보할까 고민하던 방송사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진정 시청자 주권 시대가 도래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 최근 시청자 참여 프로가 넘쳐나게 된 데는 연예인 출연 일변도의 프로에 식상해진 데다 연예인 섭외가 힘들어진 데 따른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현장 PD들도 "시청자 코드대로 만들기보다 제작진이 짜놓은 틀에 시청자를 끼워 맞추는 식이 대부분"이라는 걸 인정한다.

경실련 미디어워치 김태현 부장은 "시청자가 들러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청자가 직접 만든 작품을 방영하는 창구를 늘리는 길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상복.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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