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풍경] 6·25때 그 서점 아직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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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무 심기가 한창이다. 대지모(大地母)의 품안에 생명력이 넘치다 보니 부지깽이를 꽂아도 살 판이다. 산이 푸를 수 있는 건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벌거숭이 마음을 푸르게 가꿔야 한다는 건.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이 책을 읽는 일일 것이다. 책이 나무라면 묘목을 길러내는 것은 책을 쓰고 만들어내는 일이고, 그것을 옮겨 심는 일은 독자의 몫일 테다. 그렇다면 책방의 역할은? 굳이 비유를 이어 가자면 묘목을 산자락까지 옮겨다 주는 일이라고나 할까. 경기도 김포시에 가면 대를 이어 반 백년이 넘도록 이 일을 해오는 곳이 있다. 바로 '해동서적'이란 이름의 서점들이다. 북변동 382의 '김포점'이 본포이고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변동 827 상지프라자 2층에 자리잡은 '사우점'과 풍무동의 '풍무점'은 새끼들(?)이다.

해동서적의 본래 이름은 '해동서점'으로 처음 문을 연 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지금의 김포점 자리다. 현재 이들 서점에는 각각 50년대 말께 찍었음직한 빛바랜 흑백사진이 한 장씩 걸려 있다. 초가 지붕 아래 큼직한 글씨로 쓴 '해동서점' 간판에 곁들인 '전화 39번'이 시절을 말해 주고 있다.

주인공의 헤어 스타일이며 노타이 차림의 입성, 어린 딸과 함께 취한 포즈의 어색함 등이 예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가 바로 웬만한 원로 출판인치고 '김포 아무개'하면 다 알아주는 창업주 김성환(金成煥.78)씨다. 김포점 대표 김기율(金基栗.43)씨는 막내 아들, 사우점 대표 김기관(金基寬.46.사진)씨는 차남, 풍무점 대표 김기선(金基善.51.여)씨는 장녀다. 다른 사업을 하는 장남(54)과 호주에 살고 있는 차녀(48) 등 3남2녀 중 세명이 아버지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2세 가운데 부친의 맥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온 이는 사우점 대표 기관씨. 20년 넘게 본포를 이끌어 오다 새로 연 사우점을 맡으면서 동생에게 물려줬고 1년 뒤 풍무점 오픈에도 관여했다. 2000년 11월 사우점을 열면서 가게 이름을 바꾼 것도 그다. 그의 '책장사 집안' 얘기-.

"원래 아버지께선 토건회사에 다니셨대요.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군대에 갔는데 제대해 보니 회사도 망가지고 해서 김포 변두리인 하성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 종로에서 한성도서라는 큰 서점을 운영하던 친척 분이 '책방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더래요. 당시엔 교과서 공급권이 큰 이권이었는데 김포 일대를 담당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그러셨답니다. 전쟁통이라 가뜩이나 먹고살기 어렵던 판에 아버지로선 운 좋게 사업거리가 생긴 셈이죠."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점포래야 폭격 맞은 집을 대충 고쳐 간판은 걸었는데 교과서를 공급하는 회사가 부산 피란 중이어서 물건을 가져올 길이 막막했다. 어찌어찌해서 물자 수송을 하는 군 트럭의 신세를 지더라도 김포에 와서는 가까운 곳은 지게로, 먼 곳은 소달구지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과서를 대주어야 할 곳은 초.중.고 및 강습소까지 합쳐 30여 군데. 그때는 김포란 지역이 지금의 영등포.강서지역에다 강화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이어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그때를 생각하시며 '장사가 아니라 전쟁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여기저기서 책을 보내 달라고는 하는데 사정은 그렇지 못하지, 모두 어렵던 터라 물건은 갔는데 대금은 꿩 궈 먹은 소식이지…."

얼마나 귀 닳을 정도로 들었으면 김씨는 마치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처럼 얘기한다.

"그래도 꾸준히 하신 덕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부터 형편이 나아졌죠. 복구사업과 함께 학교 운영도 정상화하면서 대금도 제때 들어오고, 진짜 돈 되는 참고서 판매도 늘어났기 때문이죠. 하여튼 큰돈은 몰라도 자식들을 모두 공부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김씨가 가업을 본격적으로 이어받기로 작정한 건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한 83년. 사실 김씨는 어릴 적부터 책방에서 놀았으나 철이 들고부터는 그곳이 싫었다. 또래들은 신나게 노는데 툭하면 가게를 지키려니 그럴 수밖에. 서울에서 고교에 다닐 때도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동대문 근처 총판에 들러 책꾸러미를 들고 김포까지 가야 했으니. 하지만 60년대를 거쳐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잘 나가던 아버지 사업이 78년 교과서에 대한 독점 공급권이 없어지면서 지지부진해지자 어쩔 수 없이 더욱 도울 수밖에 없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와보니 사정이 더 어려워져 있더라고요. 새 책방들도 생겨나는데 연륜만 30년 되었지 뭐 내세울 게 있어야죠. 아버지도 점점 힘들어하시고요. 안타까운 마음에 어디 내가 한번 해보자 하고 나선 게 이렇게 됐습니다."

가업을 이으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정작 강원도 원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로선 실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짜낸 묘안이 수업의 집중화. 과목을 모두 월.화에 몰아 들을 수 있도록 시간표를 짠 뒤 화요일 밤차를 타고 달려와 일요일 오후까지 서점 일을 보았다. 우선 급한 대로 낭비 요소가 없는지 거래시스템을 점검하고, 진열장도 젊은 감각에 맞도록 바꿔 나갔다. 하지만 9평밖에 안 되는 규모로는 개혁에 한계가 있었다. 원래 터에 새로 건물을 지어 확보한 넓이는 27평이었지만 부친이 3등분해 나머지는 세를 주고 있었던 터. 그렇다고 주인입네 하고 10여년된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내보내기도 얼굴이 닦이는 일. 아버지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럴 바에야 차라리 책방을 걷어치우고 세를 주자"고 했다. 김포에서도 꼽히는 요지라 이미 주위에 유명브랜드 의류매장 등이 자리잡고 있는 데다 세만 받아도 책방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아 한 말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한마디로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맨 날 입버릇처럼 못해먹겠다고 하시던 양반이 노발대발하시는데…. 참, 책방에 대한 아버지의 애착이 그렇게 강하신 지 몰랐어요."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뒤 88년 결혼과 함께 김씨는 다시 개혁을 시도했다. 방법은 하나. 매장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세입자들에게 사정했다. 어렵사리 양해를 얻었다. 9평짜리에서 18평으로 트니 그런 대로 현대식으로 모양을 갖출 수 있었다. 매출도 금세 두 배로 늘었다. 그래서 이듬해 나머지 가게까지 합쳤다. 역시 그만큼 장사가 잘됐다.

'제2의 창업'이 성공한 셈이다.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터지고, 이어 인터넷 서점의 등장과 함께 서점의 대형화 바람이 불면서 위협해 왔다. 그래서 방어책으로 생각한 게 사우점과 풍무점이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김포시 인구가 20만명밖에 안 되는데 지난해 들어온 160평짜리를 포함해 크고 작은 책방이 12곳이나 됩니다. 거기다 경기는 죽어 있죠, 인터넷 서점은 파고들지…. 정말 죽을 맛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버지가 일궈놓은 문화사업을 기필코 지키겠다고 다짐한다.

"이삼십년 간 나가 살던 사람들이 찾아와 여기서 무슨 책을 사 공부했다느니, 우리 가게를 보곤 방향을 가늠했다느니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버지의 고집에 새삼 머리가 숙여져요. 그 끈을 잇는 게 제 자존심이도 하고요."

그는 요즘 작가와의 만남, 독서지도회 등 고객을 유치키 위한 '묘책'을 짜내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국민적' 영어바람 속에 영어교재 전문점을 모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업을 이으려는 몸부림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글=이만훈 사회전문기자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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