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로가는길>일지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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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산길의 동백꽃망울은 아직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그러나 다물고 있는 입이 더 야무지게 보인다.꽃망울이 벌어지면서 동백의혼도 그만큼 달아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미끄러져 신발에 들어간눈(雪)을 털다가 문득 시퍼런 하늘을 바라본다 .숲 사이로 드러난 하늘은 마치 깊은 우물 같다.일지암(一枝庵)을 지었다는 초의(草衣)선사도 산길을 오르다 숨이 차면 저 하늘을 보며 땀을 들였겠지.초의란「풀옷」인데 야운(野雲)스님의 다음과 같은 자경문(自警文)에서 따온 것이다.
「풀뿌리와 나무 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송낙과 풀옷으로 그몸을 가리리라/산야에 깃드는 새와 구름을 벗삼고/높은 산 깊은골에서 남은 세월을 보내리.」 그는 자경문의 구절대로 일지암을40여년동안 지키며 생불(生佛)처럼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자신이 손수 지은 초막을 일지암이라 한 것도 중국의 걸인 성자 한산(寒山)의 시「내 항상 생각하노니 저 뱁새도/한 몸 편히 쉬기 한 가지에 있구나(常念초료鳥 安身在一枝)」라는 구절에 감명 받았으리라.
그렇다.기와가 아닌 볏짚의 풀옷을 입은 듯한 암자를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든다.암자를 주거공간으로만 보지 말고 가만히 그내면을 들여다볼 일이다.이름을 드러내고 호의호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검박하게 살았던 초의선사처럼 느껴지 지 않는가.소쇄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암자의 자태에서 초의스님이 절로 떠올려지고 있음이다.
시(詩).서(書).화(畵).다(茶)에 일가를 이뤘던 초의선사.그러나 그런 풍류도 풍류지만 난세를 살다 간 그분의 올곧은 삶이 더 빼어난 점이 아닐까.스님의 시대는 조선말,요즘 같은 혼돈기였다.스님은 불혹의 나이에 들어와 81세로 열반에 들 때까지 암자를 단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또한 일지암은남종화의 산실이라는 점에서도 유명하다.
소치(小癡)가 초의선사에게 그림을 배우러 왔던 것인데,눈 밝은 그들의 만남이 곧 한국화단의 남종화를 꽃피우게 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소치는 초의선사에게 기본을 다지고 난 뒤 한양의추사(秋史)에게 엄혹한 그림 수업을 받았다고 한 다.
※대흥사 일주문에서 걸어서 40분 정도 걸린다.(0634)33-4964.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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