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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낯선 골프장에서 향수를 느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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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헤딩한다는 기분으로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준비했던 자료, 우리 여행의 유일한 객관적 지표이자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갈 길을 알려준 이정표가 있었으니 2006년 골프다이제스트 국가별 Best Course 리스트였다.

아예 방문 계획조차 없었던 아일랜드에서는 이 리스트가 우리의 생명줄이나 다름 없었다. 아일랜드 남쪽 끝에서 북아일랜드 끝까지 종단을 하기로 결정한 우리는 아일랜드 Best Course 주소와 우리 동선의 교차점을 찾아나갔다.

킬케니 카운티 ‘토마스타운(Tomastown)’이라는 카톨릭 내음 물씬 풍기는 지명의 마을을 찾게 된 것도 그와 같은 계기였다. 아일랜드 내 코스 순위 7위, 잭니클라우스 설계, '유럽의 오거스타'라 불리우는 코스, 월드골프챔피언십(WGC)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챔피언십을 치뤄내면서 세계 탑랭킹 선수들이 이미 발도장을 찍고 지나간 골프장 마운트줄리엣(Mount Juliet, 7,246yd)이 그 곳에 있었다.

토마스타운은 마을 어귀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폐허가 된 오래된 석조 건물의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심지어 골프 코스에도 성모상을 모시고 있는, 국민의 90%가 카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임을 고려해 본다면 옛 수도원이나 성당 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 집들도 흡사 우리 나라로 치면 안동 하회마을 정도의 느낌이 날 만큼 고풍스러웠다. 집 터를 둘러싸고 있는 넒은 울타리 안에는 집집마다 말 몇 마리씩을 풀어놓고 있었다. 거칠지만 목가적인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묻어났다. 외지인에겐 다소 난해한 일방 도로 시스템에 집중하며 경계 운전을 하고 있는데 전후좌우에서 터프한 현지 운전자들이 우리를 장애물 취급하며 물결처럼 두 갈래로 나누어지며 우리 차를 피해갔다. 길을 묻기 위해 마을 중심의 펍(Pub)에 들렀다. 백인임에도 거무튀튀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와일드한 아저씨들이 시끄럽게 술을 마시다 갑자기 조용, 새까맣게 그을린 동양 여자에게 일제히 주목했다. ‘실례, 실례, 아이고 쑥스러워라.’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숙소를 물었다. 뭔가 알아듣기 힘든 아이리쉬 영어로 답변이 돌아왔다. 제법 영어가 된다는 다른 아저씨 한 분이 가게 문 앞으로 몸소 나와 방향을 알려주셨다.

얼핏 보아도 천 명이나 살까 싶은 소읍 정도 크기의 마을이었다. 주유소도 따로 없고 길가에 셀프 주유기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단 차를 세우고 차에 기름을 채웠다. 그 때 그 시절 김장 담고 연탄만 쌓아 놓으면 배가 부르다 하시던 어머니 맘이 이해가 간다. 여행을 다니다 보니 차에 기름 가득하고 잘 곳만 구해 놓으면 굶어도 맘이 든든했다.
일단 목적지에 도달하면 숙소부터 정하고 맘 편히 저녁 식사와 술 한 잔을 곁들이는 것이 평소 우리의 여행 루틴이었다. 하지만 워낙 시골 마을에 폭우마저 쏟아져 관광객이 없을테니 숙소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던 안일한 생각은, 10여 개의 B&B 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큰 일이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말은 잘 안 통하고….

사실 다니다 보면 가장 흔한 간판이 B&B지만 막상 빈방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B&B는 한 집에 방이 많아야 서너 개 정도다. 그러니까 한 소도시에 B&B가 열 곳이 있다고 해도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우리나라 웬만한 장급 여관 하나가 소화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외곽에서 맘씨 좋은 할머니의 아담하고 멋있는 B&B에 안착할 수 있었다. 지적으로 보이는 아일랜드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부만 살고 있는 아담한 농장이었다. 큰 어미 말과 망아지가 텃밭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여전히 비가 퍼붓고 숙소 찾기에 많이 지친 우리는 저녁 식사를 위해 다시 다운타운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베란다에 버너를 설치하고 안남미 만도 못한 쌀로 밥을 지었다. 냄새가 방에 밸 것 같아 노심초사, 부채질을 해가며…(그래도 먹겠다는 집념이라니…) 하지만 맨밥에 고추장 볶음을 비벼 먹었던 그 날의 밥은 꿀맛이었다.

소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절대 고요 그 곳에서 다음 날 아침 10시가 넘도록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우린 할머니가 준비해주신 화려한 아침상을 해치우고 에너지를 충전하자마자 마운트줄리엣 골프장으로 돌격했다.

마운트줄리엣은 세계적 수준의 골프장다운 외모를 과시했다. 클럽하우스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 건물은 약 200년 전에 한 백작이 지은 저택을 개조한 것이라 했다. 코스는 길고 도전적인 규모였지만 전체적으로 선이 곱고 결이 부드러운 덕에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비가 계속 됐지만 질퍽거리는 곳 없이 배수 관리도 잘 되어 있었고, 그린 주변은 아름답고 다양한 해저드로 꾸며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린은 딱딱하고 빠른 유리알이었다.

비를 홀딱 맞았지만, 워낙 좋은 코스라 힘든 줄도 모르고 코스 예찬 속에 라운드를 마쳤다. 오랜만에 만나는 파크랜드형 골프장, 한국 취향에 딱 맞게 잘 빠진 골프장이었다. 영국권 골프장을 경험하면서 우리나라 골프장들이 얼마나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덕분에 이 곳에서 미국식 코스 설계를 만나면 왠지 한국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고, 그래서 골프의 고향인 영국, 아일랜드에서도 미국식 코스에 더 열광하는 우리를 발견하곤 한다.

와인을 곁들인 스테이크 보다 고추장을 곁들인 맨밥을 훨씬 사랑하는 것처럼…. 익숙함이란 무서운 존재다.

이다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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