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투구 버릇 훔쳐보지 마’ 임창용 큰 글러브로 감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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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의 마무리 투수 임창용(32). 마운드에 선 그의 왼손에는 제법 큰 글러브가 눈에 띈다. 활짝 펴면 외야수 글러브만큼 크다. 공을 쥔 오른손은 그 큼직한 글러브 안에 감춘 상태다.

임창용이 큰 글러브를 끼게 된 것은 일본의 ‘현미경 야구’에 맞서기 위해서다. 에이전트 박유현씨는 “임창용이 오른손 움직임을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 최근 큼지막한 글러브로 바꿨다. 지난달까지 쓰던 글러브보다 3㎝ 더 길고, 깊이도 더 깊다”고 전했다.

임창용은 글러브를 바꾼 뒤 ‘방패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그는 글러브 교체 이후 20일 히로시마전까지 최근 8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 중이다.


임창용은 5월 23일 롯데전까지 18경기에서 1실점만 했다. 그러나 이후 인터리그 10경기에서 7점이나 내줬다. 상대 타자가 기다렸다는 듯 때린 홈런도 4개나 있었다. 임창용은 “당시 컨디션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상대 타자들이 투구 습관을 읽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본 야구는 정보의 수집·분석 분야에서 세계 최고다. 팔뚝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글러브 위치의 작은 차이로 투수를 읽어낸다. 심지어 투수의 껌 씹는 박자를 통해 공을 예측하기도 한다. 임창용은 자신의 투구 버릇이 노출된 느낌을 받자 재빠르게 글러브부터 바꿨다.

1999년까지 일본 주니치에서 활약했던 선동열 삼성 감독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놨다. 선 감독은 “내가 일본 진출 첫해(96년) 부진했던 이유 중 하나가 투구 버릇이 노출됐던 탓이었다. 알고도 당한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상대 전력분석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도 큰 글러브를 써봤다”고 회상했다. 선 감독은 지난해까지 임창용을 3년 동안 데리고 있었다. 그는 “삼성 시절 임창용은 내 눈에도 띈 버릇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런데 요즘 TV를 보니 그런 결점들을 많이 감췄더라. 투구 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변화를 준 것이 성공한 것 같다”고 말했다. 글러브를 바꿨다고 결점이 모두 감춰질 수는 없다. 그러나 임창용이 일본 타자들의 창끝을 영리하게 막아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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