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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근대화의 대포 소리 집권층은 귀 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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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 책은 ‘근대’가 동터오던 시기를 조명하고 있다. 조선의 바다 이야기다. 16~19세기 포르투갈·영국·네덜란드·프랑스·러시아·미국 등 ‘이상한 모양의 배들’들이 몰려오던 바다…. 서양과 조선은 이렇게 만났다. 사학도 출신인 저자는 2008년 현재의 독자들을 이 바다로 이끈다. ‘우리’가 ‘남’(타자)를 보는 시선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돌아보자는 뜻이다.

“이해(1848년) 여름 가을 이래로 이양선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다섯 도의 큰 바다에 출몰했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어떤 것은 뭍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어떤 것은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했다.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헌종실록’)

19세기 조선의 ‘바다 이야기’

근대는 바다 저 멀리서 홀연히 나타났다. 서양의 상인·탐험가·군인들이 시장과 식민지 확장을 꾀하며 조선의 바다로 향했으니, 배에 실은 진짜 화물은 근대의 얼굴이자 속내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였다. 그렇게 홀연 나타난 이방인들을 용납하기엔 조선이 걸어 잠근 쇄국의 빗장은 두껍기만 했다.

전형적 접촉 사례 하나. 1832년(순조 32) 7월 17일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가 황해도 장연 바다에 정박했다. 첫 만남의 상대인 조선 어부들은 이방인들이 떠나기를 바라는 몸짓을 하면서도 해안으로 초대해 생선과 술을 대접했고 곧 관리들을 데리고 왔다. 이방인들은 육지에 감자도 심고 책을 나눠주기도 했다. 긴장 속에서도 우호적이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조선의 두꺼운 문을 확인한 이방인들은 두 달 만에 닻을 올렸다. 그리고 황해감사는 이방인들과 교류한 관리들을 벌주고 책도 불태웠다.

최초의 당혹과 공포와 호기심, 조심스런 접촉을 통해 적의(敵意) 없음을 확인함, 약간의 우호적 교류, 이방인의 끈질긴 문호 개방 시도와 조선 측의 끈질긴 거부, 이양선의 출항과 조선 조정의 무용(無用)한 뒷논의, 그리고 이방인과 교류한 이의 처벌. 19세기 조선과 이양선의 접촉에서 반복되는 이 패턴의 다양한 사례들을 저자는 현장감과 생동감을 불어 넣어 재구성해냈다. 광범위한 자료의 비교 검토 덕분에 보다 분명해진 사건도 있다.

1622년(광해군 14) 돛대 30여 개를 세운 큰 배가 사도진(고흥군 금사리) 앞바다에 들어오자 조선군이 화살을 쏘았고 조선인 8명이 사로잡혔다. 저자는 네덜란드 상선 혼트호로 추정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문서에 따르면 혼트호는 바타비아에서 일본으로 향하다 항로에서 벗어나 ‘코레아 병정 36명의 급습’을 받고 격전 끝에 겨우 물리쳤다. 우리 실록과 네덜란드 기록이 각각 사도진과 제주도로 다르지만 1622년이라는 시기가 같고, 항로상 전라좌수영 사도진 수군과 교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조선과 유럽 국가 간 최초 교전이다.

‘최초’ 기록에 관심 많은 독자라면 1816년 9월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한 영국 군함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각별할 듯 하다. 함대를 이끈 맥스웰 대령·홀 대령이 마량진첨사 조대복, 비인현감 이승렬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최초’ 기록이 양산됐다. 이승렬은 최초로 서양식 진료를 받았고 조대복은 최초로 성서를 손에 넣었으며, 그 둘은 최초로 포크 나이프 스푼을 사용한 서양식 식사를 했고 최초로 서양 와인을 마셨다. 나중에 조선 조정은 이 둘을 파면시켰지만 홀 대령은 조대복을 이렇게 평했다.

“자신과 무척 다른 사람들의 관습을 예의 바르고 편안하게 따르려는 그의 태도는 탄복할 만했다. 그의 예의범절은 그 사회의 문화 수준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예의 바르고 관찰력이 예리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군의관 매클라우드도 “우리가 만난 모든 조선인들의 행동에는 인간적인 솔직함이 있었으며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성향은 없었다”고 평했다.

저자의 관심은 접촉의 전말과 기록을 정리하는 일도, 시세 급변에 눈 감고 쇄국을 고수하다 망국에 이른 조선을 반면교사 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우리와 타자의 소통과 이해에 눈길을 돌린다. 집권층은 격식화된 공문서의 틀에 갇혀 이방인을 추상적으로만 인식하면서 경직된 쇄국으로 일관했다. 재야 지식인 일부는 중국에서 입수한 서적을 통해 단편적 지식과 관념의 차원에서 이방인을 인식하고 교류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실천성을 결여한 ‘서재의 사상’에 그쳤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바다라는 삶의 터전에서 일상의 노동에 충실했던 조선의 섬 주민이나 바닷가 어민들, 그들 가까운 곳에 있던 말단 관리들이다. 생동하는 삶의 현실 속에서 이방인과 대면한 그들은 호기심과 공포 사이에서 머뭇거리면서도 이방인에 대해 대체로 친절했고 크게 혐오하지도 않았다.

영국 군함 리라호에 올라타 대단한 호기심으로 배 안을 휘젓고 다닌 주민들, 1845년 7월 제주도를 거쳐 거문도에 상륙한 영국 측량선 사마랑호 선원들과 술을 교환한 주민들, 사마랑호 선원들이 물 나르고 텐트 세우는 것을 도와준 제주 주민들, 1854년 러시아 증기선 보스토크호가 수심 얕은 곳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성심껏 도와준 거문도 주민들, 1856년 프랑스 해군 게랭 제독이 지휘하는 비르지니호에 소를 팔고 술·담배·비누를 받았지만 곧 관리에게 빼앗긴 원산도 농민들 등등. (게랭 제독은 “농민과 어부들은 프랑스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가장 친절하게 대접했다”고 보고한다.)

이념이나 사상의 더께가 쌓이지 않은 생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동경한다는 점에서 저자는 순진하다. 무지렁이 백성들의 대책 없는 친절은 결국 제국주의를 도운 것 아니냐는 ‘사회과학적’ 트집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그 순진함이 유의미한 까닭은, 예컨대 생활 세계의 자율성 역동성과 멀어져 무기력해진 작금의 우리 제도권 정치 풍경 때문이다.

19세기에 이양선을 타고 나타난 이방인과 조선인 사이의 장벽과 방불한 우리 안의 장벽은 또 얼마나 많은지. 결국 저자의 훈계 아닌 훈계는 이렇다. 참된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은 아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비로소 온전히 싹튼다는 것이다.  

표정훈<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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