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대신‘바둑의 바다’에 풍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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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바둑판 앞에 모여 앉은 어린이들의 모습이 싱그럽다. 인성 교육과 두뇌 개발을 위해 전교생에게 바둑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치는 흥진초등학교의 새로운 실험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궁금하다. [사이버오로 제공]

14일 초등학생들의 바둑축제 현장인 군포시 흥진초등학교(교장 김용대)를 찾아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바둑에 몰두한 어린이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이 공립학교는 정규 교과목으로 매주 한 시간씩 전교생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바둑 특성화 학교다. 이 학교에서 14일부터 ‘전교생이 참여하는 신나는 바둑축제’가 시작됐다. 이 축제는 19일까지 이어진다.

오후 1시. 3층 강당에는 어린이들이 가득 둘러앉아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한쪽에선 학부모들과 학생이 함께 어울려 ‘알까기’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대형 바둑판에 몰려 앉아 ‘묘수풀이’가 한창이었다.

복도엔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 등 스타의 화보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다른 한쪽 방에 가보니 ‘바둑 영재’들이 따로 모여 강사로 영입된 박문흥 아마 7단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잠시 후엔 바둑과 관련한 교육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추진할 것인가, 바둑 교육의 장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학부모 상대 세미나도 열렸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2005년)에 따르면 20대 14.2%, 30대 21.7%, 40대 23.4%, 50대 이상 21.7%만이 바둑을 둘 줄 안다고 답했다. 20년 전 갤럽 조사에서 20세 이상 바둑팬이 1000만 명으로 나온 것을 생각하면 크게 줄어든 모습이다. 요즘 10대들이 컴퓨터게임에 몰두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추세는 가속화될 것이고 그래서 바둑의 위기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흥진초등학교의 ‘새로운 실험’은 더욱 놀랍기만 하다.

이 학교의 조상연 교감은 “2004년 전교생에게 바둑교육을 시작, 월 2시간씩 가르쳤는데 학부모 설문조사 결과 85%가 늘려 달라는 의견이어서 2005년부터 주 1시간으로 늘렸다”고 말한다. 바둑교재도 따로 만들었고 올해는 유치원에서도 바둑교육을 시작했다.

이 학교의 선수들은 이미 홍콩이나 태국의 청소년대회에서 우승컵을 따내기도 했다. 이날 만난 학부모들도 대부분 바둑교육에 적극 찬성했고 한 학부모는 이 매력 때문에 전학을 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바둑 수업을 시작한 후 흥진초교는 교육에 대한 민원이 3년 동안 1건으로 크게 줄고 왕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군포시 대부분 학교 학급 수가 감소하는 추세에도 이곳만 매년 학급이 증가하고 있다. 또 국내 여러 초등학교와 미국 미주리대, 태국·베트남의 여러 곳에서 바둑 교육의 사례를 듣고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지난해 부임한 김용대 교장은 바둑을 잘 모르면서도 그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열렬 지원자가 됐다. 그는 “톨스토이의 일기장을 보면 ‘체스는 과학이고 바둑은 철학’이라는 얘기가 나온다”며 “학생들은 지금 기초적인 철학을 공부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철학 부재의 시대에 바둑을 통해 철학과 교감하게 한다는 발상이 향기롭다. 초등학교 4학년에 인생이 결정된다며 학원 순방에 내몰리고 있는 지친 어린이들에게 바둑의 느릿한 사고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바둑은 전자오락 게임과 달리 논리적 사고를 배양하고 집중력 향상이나 정서 함양에도 도움이 된다. 이 같은 흥진초등학교의 사례가 알려지면서 경기도만 해도 벌써 여러 학교가 바둑 특성화 교육을 채택했다.

흥진초등학교의 바둑교육을 열정적으로 이끌어 온 조상연 교감은 “바둑교육은 성격이 차분해지는 등 인성(人性)이나 두뇌 개발 쪽에 뚜렷한 성과가 있다. 다만 그걸 어떻게 과학적으로 검증하느냐가 어렵다. 경기도바둑협회의 도움을 받아 내년 1월까지 그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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