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서울의 상징과 문화거리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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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문화의 거리를 만들자」.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멋진 구호다.문화의 거리.그러나 나의 가슴은 답답하다.도대체 우리나라의 어디가 문화의 거리인가.문화의 거리 하면 많은 사람들은 외국의어느 곳을 연상할 것이다.파리의 퐁피두센터 언저 리나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 혹은 소호같은 곳을.그래서 답답하다.
무엇 때문에 우리에겐 문화의 거리가 없을까.5천년 문화국가라고 국내외에 열심히 자랑하면서 그까짓 거리 하나쯤도 없는 것일까.지방도시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수도 서울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무엇보다 서울 하면 떠오르는 상징물이 마땅치 않다.교통지옥 등 부정적 요소가 먼저 떠오른다.정도(定都) 6백년 기념행사까지 치른 세계적 도시인 서울이 반반한 상징 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종로구사간동(司諫洞)과 소격동(昭格洞)일대를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사실서울에는 광장 하나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시민들이 부담없이산책하거나 쉴 공간이 없는 것이다.거리 역시 마찬가지다.부담없이 걷고 싶은 서울의 거리가 어디 있는가.
삭막한 서울에서 북촌(北村)지역의 문화동네 추진사업은 꽤 고무적이다.경복궁 동쪽 일대로부터 인사동(仁寺洞)까지의 거리는 참으로 멋진 곳이다.서울의 얼굴로 삼아도 충분할 자양분이 있는곳이다.현재 이 지역은 많은 미술관과 화랑이 밀 집해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문화예술의 샘터는 파편화돼 한 줄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사간동과 인사동을 이어주는 보도조차 제대로 없는 형편이다.게다가 이 지역의 분위기를 살벌하게 해주는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있다.문화의 거리에 총을 든 수문장이 행인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다면 참으로 슬프지 않을 수 없다.국군병원은 문화거리의동선(動線)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원래 이 자리는 조선총독부가 우리의 전통을 깬 상처의 흔적이다.문민정부시대에 국군병원이 일제(日帝)잔재의 자리를 계속 지킬 이유가 없다.이 병원자리에 종합문화예술센터 같은 것이 건립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당국의 결심이다.문민(文民)이 외출한 문민정부에 제언하고 싶다.이제 우리의 철학과 문화를 제대로 챙겨야 한다.현정부는 가까스로 독립한 문화부를 어느 날 갑자기 거세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며 출범했다.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 품 걱정보다껍데기인 옛 조선총독부의 건물철거 강행을 시도하고 있다.총독부건물은 50년도 안되는 역사의 산물이다.하지만 박물관의 소장품은 5천년도 넘는 우리 겨레의 자존심이다.세상에 박물관 건물도없이 유물부터 피난 보냈다가 또다 시 이사해야 하는 박물관은 우리나라 밖에 없다.이는 고도(古都)경주 시내의 고속철도 통과계획과 함께 무문화(無文化)정부임을 과시하는 행태다.
정부가 아무리 「삶의 질」의 세계화를 위한 21세기 문화복지청사진을 내세워도 설득력이 없다.현정부의 최대 실패작은 문화정책이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도대체 문화예술계에서 신바람이 일 날은 언제일까.
무문화정책시대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기대를 걸어본다.국군병원을 이전하라.그리하여 사간동.인사동 지역을 문화예술의 메카로 만들라.그렇다면 상징물 하나 없는 서울에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다.「비자금 수천억원을 가지고 노는 시대」에 그까짓 병원 하나쯤 옮기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척도일 따름이다.
월전(月田)미술관에서 시작해 경복궁을 바라보며 인사동까지 한가롭게 걸을 수 있는 시절이 온다면 참으로 우리는 서울시민의 긍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겠다.국군병원.미국대사관 숙소의 이전문제를 서울의 상징과 맞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 아닌가.
윤범모 미술평론가.강원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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