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 CB’ 무죄 선고 … 주주들 스스로 용인한 손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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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특검이 기소한 혐의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에버랜드 CB 발행 사건이었다. 삼성 의혹 사건 고발인들은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이 불법 경영권 승계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 회장과 비서실의 계획 아래 기존 에버랜드 주주들이 실권했고, 이재용 전무 남매가 CB를 헐값에 사들여 에버랜드의 지배권을 소유하게 됐다는 것이다. 삼성그룹 순환출자구조의 정점에 있는 에버랜드를 넘기는 방법으로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승계했다는 논리다. 특검도 이 전 회장과 삼성 임원들에 대해 에버랜드 CB를 헐값에 넘겨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를 적용해 기소했다.


◇“에버랜드 CB 발행 배임죄 안 된다”=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CB 발행을 위한 이사회 결의 및 주주 통지 절차 등에 일부 흠결이 있으나 기존 주주들에게 실질적 인수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기존 주주들이 인수권을 부여받고도 실권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CB 발행이 비서실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실권으로 인한 기존 주주들의 손해(에버랜드 지배구조 변동, 주식 가치 하락)는 스스로 용인한 것이므로 배임죄로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에 앞서 CB 발행 당시 에버랜드 사장과 경영지원실장이던 허태학·박노빈씨는 1·2심에서 배임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두 사람은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전 회장 사건에서 새로운 쟁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허·박씨에 대한 확정판결을 유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사건은 검찰이 무혐의 처분한 것을 특검이 기소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역시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BW를 발행한 시점(1999년)에서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으려면 법정형이 무기징역 이상이 돼야 한다. 이득액이 50억원 이상 인정돼야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주당 순이익 증가율을 최대(연 40%)로 봐도 44억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차명계좌를 통한 주식 매매로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혐의는 일부 인정했다. 소득세법에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에 대한 과세 규정이 신설된 것은 99년 1월 1일이다. 삼성이 차명계좌를 이용한 것은 선대 이병철 회장 때부터다. 따라서 재판부는 법 규정이 신설된 이후의 혐의 가운데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2003년부터 유죄로 인정했다.

이 전 회장이 6월 초 1830억원의 세금을 냈고, 차명계좌로 인한 증여세가 확정되는 대로 추가 납부하겠다는 뜻을 밝힌 점도 양형에 참작됐다. 재판부는 “수사와 재판을 받은 뒤 세금을 납부했다고 해서 훼손된 조세 정의가 쉽사리 회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법의 일정 부분이 회복됐다”고 말했다.

◇특검, 판결에 불복해 항소할 듯=특검은 이날 선고 직후 항소할 뜻을 밝혔다. 1심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에버랜드 사건에 대해선 “재판부가 절차상 흠결을 인정해 놓고 무죄로 판단한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존 주주들에게 인수 여부를 결정할 시간을 줬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못한 절차상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삼성SDS BW 발행 사건에 대해선 “변호인 측 증거에서도 손해액이 268억원이라 밝히고 있는데 손해액이 50억원이 안 돼 시효가 지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주요 혐의에 대해 “특검 측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특검은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기보다는 수년 전 검찰 수사 자료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에버랜드 CB를 실권한 법인 주주들이 특검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왔지만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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