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노무현의 굴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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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집권 여당 대표의 입에서 ‘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경제는 위기 상황이고, 외교는 곳곳에서 구멍을 드러내고 있다. 외교는 굽신, 경제는 불신, 남북 관계는 망신이어서 삼신할미도 포기한 ‘삼신 정부’란 말까지 나왔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모든 것을 떠나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는 참모진의 문제가 가장 크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가 모여 있어야 할 청와대에 3류급 범재와 둔재들이 설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비록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제 ‘항복 선언’으로 수습 국면을 맞긴 했지만 청와대 참모진의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코미디 같은 ‘봉하마을 괴담’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수백만 건의 대통령 기록물이 봉하마을의 사저에 가 있는 것은 오래전에 확인된 사실이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의 명백한 위반이다. 봉하마을 측은 법에 따라 원본은 국가기록원에 다 이관했고, 자신들은 사본만 갖고 있다면서 법에 보장된 전직 대통령의 배타적 열람권만 확보되면 언제든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취했었다. 그때까지 잠정적으로 사본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사건이 검찰 손으로 넘어가기 직전, 노 전 대통령이 자료 일체를 반환하겠다고 물러섬으로써 일단락되긴 했지만 이 문제는 처음부터 국가기록원과 봉하마을 사이에 해결할 문제였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노 전 대통령 측이 청와대 서버를 통째로 가져갔느니, 해킹으로 인한 국가 기밀 누출이 우려된다는 등 괴담 수준의 각종 의혹을 제기하며 봉하마을을 압박해 왔다. 전임 대통령을 국기 문란의 중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제대로 된 참모라면 애초에 국가기록원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토록 하고 청와대는 뒤로 빠지는 모양새를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 관계자라는 익명에 숨어 계속해서 언론 플레이를 하며 펌프질을 해댔으니 전임 대통령을 흠집 내려는 비열한 정치 공작 아니냐는 의심을 산 것이다.

국정은 위기 상황인데 전임자 때리기에 열중하는 청와대를 보면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고민해 봤는지도 의문이다. 지금 국면에서 봉하마을 문제가 그토록 화급한 현안이었을까. 그러니 국면 전환용이니, 봉하마을이 준비 중인 시민참여형 토론 사이트인 ‘민주주의 2.0’이 ‘제2의 아고라’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공작이라느니, 친노(親盧) 세력의 재결집을 막기 위한 포석이라느니, 노무현의 정치 재개를 차단하기 위한 음모라느니…,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온 것이다.

봉하마을을 압박해 결국 항복을 받아낸 참모는 한 건 했다고 지금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숙맥이 틀림없다. 국론을 통합하고,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짓을 한 셈이니 그게 과연 대통령에게 득이 되었겠느냐 이 말이다. 간계(奸計)만 있지 지혜가 없는 탓이다. 무능함보다 무서운 것이 비겁함이다.

혹시라도 이 대통령이 “무조건 노무현이 한 것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세간의 농담에 홀렸다면 정말 한심한 일이다. 그가 할 일은 하루빨리 노무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이미 지나간 버스다. 배척하지 말고 끌어안는 통 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기는 길이고, 난국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필요한 인재를 폭넓게 골라 쓸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의 특권이다. 그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능하면서 비겁한 참모를 가려내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쓸데없는 데 공력을 낭비하고,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참모라면 경계해야 한다. 볼썽사나운 신구 정권 정면 대결 양상으로 치닫던 봉하마을 괴담 파문은 이제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이 대통령은 물론이고 나라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다. 국민은 갈등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