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중독자 … 70대 스승 … 미국을 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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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현실을 이겨내지 못한다.

마약 중독자가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 홈런더비에서 신기록을 세웠다면, 그리고 이 홈런더비 이벤트가 10년 전 고교 시절 은사와의 약속을 그대로 지켜낸 것이라면. 영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감동적인 장면이 15일(한국시간) 미국 야구의 고장 뉴욕 양키스타디움에서 펼쳐졌다.

미국 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의 슬러거 조시 해밀턴(27)은 이날 올스타 홈런더비 1라운드에서 28개의 공을 양키스타디움 담장 바깥으로 넘겼다. 역대 홈런더비 사상 1라운드 28개는 최다 홈런 신기록(종전 뉴욕 양키스 바비 어브레유의 24개)이다. 양키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그의 홈런을 축하했고, 이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본 미국의 야구팬들도 그의 인간승리에 박수를 보냈다.

해밀턴은 코카인 중독자였다. 그로 인해 야구와도 결별했다. 열 차례가 넘게 재활센터를 다녔으나 실패했고, 가족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해밀턴이 누군가.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사상 ‘최대어’로 꼽히던 유망주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현재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 조시 베켓을 2위로 밀어내며 전체 1순위로 탬파베이에 뽑혔다. 입단할 때는 무려 396만 달러(약 40억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승승장구하던 해밀턴은 2002년 4월 교통사고를 당했다. 치료 도중 생기는 통증을 피하기 위해 마약을 시작한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문신가게에 들러 온몸을 흉측한 문신으로 도배하기도 했다.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간 것이다. 이후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 2004년에 쫓겨났다.

마약 값이 모자라 손 벌릴 데가 없자 친할머니(매리 홀트)를 찾아갔다. 할머니마저 나중에는 마약을 끊지 못하는 그를 내쳤다. 그날을 해밀턴은 지금도 기억한다. “2005년 10월 6일, 할머니가 나를 버린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코카인을 끊었다.”

다시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리고 할머니와 같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재활이 계속됐고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야구를 하게 해달라고 청원한 끝에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왔다. 2007년 신시내티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뒤 올해 텍사스로 이적해 전반기 최다 타점(95개)에 21홈런을 기록 했다.

약물의 진흙탕에서 빠져 나온 해밀턴은 스승과의 오랜 약속도 실현했다. 해밀턴에게 이날 공을 던져준 71세의 백발 노인 배팅볼 투수는 그의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주 랄리 고등학교 근처의 야구부 코치 클레이 카운실. 해밀턴이 다른 학교 학생이었지만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그는 방과 후에도 항상 배팅볼을 던져주며 독려했다.

해밀턴은 당시 “만약 내가 메이저리거가 돼서 홈런더비에 출전한다면 꼭 코치님을 부르겠다”고 약속했고, 10여 년이 지난 이날 그 약속을 지켰다. 왼손에 공을 두 개 쥐고 오른손으로 공을 능숙하게 뿌려댄 이 노인은 제자의 여전한 타격 솜씨에 힘든 줄을 몰랐다.

해밀턴은 지금도 한 달에 세 차례 약물검사를 받고 있다. 유혹도 여전하지만 의지력으로 지켜 나간다. “나 같은 실수는 반복돼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주어진 재능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지역 재활센터에 나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줄 때마다 그가 하는 말이다.

김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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