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원로 민속학자 임석재 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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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동짓날 꼭두새벽에/할머니는 할머니는/팥죽을 한 양푼 퍼서 들고/장독에 한 숟갈 뿌리시고/대문에 한 숟갈 뿌리시고/부엌에한 숟갈 뿌리시고/몹쓸 잡귀 어서 어서 물러가라고/입속말로 가만가만 외우신다」(임석재의 동요 『동짓날』에서) .
언제부턴가 밸런타인데이만 되면 초콜릿이 동날 정도로 법석을 떨면서도 동짓날에는 팥죽 구경하기가 힘들게 돼 버렸다.이 동요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도시 성인들에게도 옛 동짓날의 풍습을 아스라이 떠올려 주기에 충분하다.
구전민요와 설화의 발굴에 평생을 바쳐온 원로 민속학자 임석재(任晳宰.93)옹이 이번에는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관습과 풍습을되살려주기 위해 일생동안 써온 주옥같은 동요 3백여편을 4권짜리 전집 『임석재 민속동요』(고려원 미디어)로 묶었다.각권의 제목은 『날이 샜다』『씨를 뿌리자』『봄아 어서 오너라』『동요를부르자』.
이 책은 동요라고 해서 단순히 어린이들만을 위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면 곤란하다.위의 작품에서 확인되듯 옛것을 잊고 지내기는어린이들이나 마찬가지인 성인들에게도 참으로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아흔 셋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화의 전승 에 힘쓰는 노학자의 열성에 저절로 머리 숙여진다.동요마다 그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고 장욱진화백과 프랑스에서 활동중인 화가 방혜자씨의 삽화도 담겨있다.
이 책에 실린 동요는 한결같이 사라져가는 우리의 풍습과 잊혀져가는 설화를 노래하고 있다.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사투리의 맛깔까지 살리고 있는 任옹의 동요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는 그 옛날 이야기꾼으로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할을 대신 한다.
설날.정월 대보름.단오.추석.동짓날.섣달 그믐 등 절기에 따른 풍습,모내기.보리타작.물레질.절구질.맷돌질.풍어제.당산제 등 농어촌 사회의 생활풍속,구전설화와 민요 등이 풍성하다.
1권 『날이 샜다』에 실린 『쥐』라는 작품을 읽으면 금방 시골 초가가 다가온다.「…살강 밑에 쥐란 놈 나쁜 놈이다/먹다 남은 사과를 놓아 두며는 몰래와서 갉느라고 싹 싹 싹/뒤주 안의 쥐란 놈 나쁜 놈이다….」부엌의 벽 중턱에 드 리워진 선반을 일컫는 살강과 곡식을 담아두는 세간인 뒤주는 한때 시골집 풍경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 아닌가.특히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한 동요는 어른들이 읽어도 바로 그 이야기였구나라고 무릎을 치게 만든다.
특정 지역에서 전해오는 설화를 소재로 했거나 배경설명이 필요한 동요는 별도로 뽑아 최래옥(崔來沃)한양대교수가 구수한 문체로 해설까지 달았다.물론 앞에 뽑아낸 『동짓날』이라는 동요에서도 동지의 뜻풀이와 팥죽을 끓여 먹는 이유,또 그 팥죽을 집안여기 저기 뿌리는 행위에 담긴 뜻 등 자세하게 설명했다.
93년에는 60여년동안 채록한 민간설화를 12권짜리 『한국구전설화전집』으로 담아낸 任옹은 동요집을 펴내면서 『어린이들이 샛별과 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요를 집대성했다』고 밝혔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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