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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멋지고… 독하고… 웃기고… 만주벌판‘세 놈의 무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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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놈놈놈’은 식민지시대 만주는 항일과 친일의 대립공간이었다는 전통적 접근을 거부한다. 대신 한바탕 노는 오락 공간으로 재해석한다.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접근이다. 핵심은 대범하게 설계하고, 치열하게 찍어낸 액션이다. 도입부 열차강도 장면, 귀(鬼)시장 대결 장면, 영화의 절정인 후반부 15분 길이의 대평원 추격전 등등, 새로운 디자인의 롤러코스터를 갖춰놓은 놀이공원에 나들이 온 듯하다. 특히 산타 에스메랄다의 ‘돈 렛 미 비 미스언더스투드’를 비롯, 액션장면에 곁들여지는 음악의 흥겨움은 액션의 쾌감에 가속도를 더하는 효과를 단단히 낸다.

세 주인공은 이렇다. 돈을 대가로 보물지도와 다른 두 사람을 쫓는 현상금 사냥꾼 도원(정우성), 유아독존의 잔인한 성품으로 마적단을 이끄는 청부해결사 창이(이병헌), 쌍권총을 쏘면서 허허실실 임기응변으로 놀라운 생존력을 발휘하는 열차강도 태구(송강호)다. 제목대로라면 차례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인데, 관객에게는 각각 ‘멋진 놈’ ‘독한 놈’ ‘웃기는 놈’처럼 다가온다.

일단 송강호의 너스레와 고차원의 몸 개그가 코믹하다. 최근 충무로에서 거의 없었던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도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다. 액션은 단연 정우성이다. 그는 질주하는 말 위에서 장총을 돌리며 역주행하거나 도르래 외줄을 한 손으로 잡고 공중을 돌며 총격전을 벌인다. 잠시 숨이 멎을 만큼 멋지다.

이병헌의 ‘나쁜 놈’, 즉 창이는 볼수록 이상한 놈이다. 마적답지 않게 귀족적인 취향이다. 또 다른 두 사람에 대한 희한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창이의 손에 들어왔어야 할 보물지도를 태구가 먼저 훔치면서 추격전이 시작되는데, 창이는 점차 지도 자체가 아니라 태구에게 독한 집착을 드러낸다. 태구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사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세 캐릭터의 ‘전력’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뭘 하고 살았는지, 어쩌다 만주까지 흘러 들어왔는지가 아예 생략됐다. 일례로 도원과 태구가 서로 꿈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감독은 도원이 말할 차례에 의도적으로 말머리를 꺾어버린다. 이들이 나라 없는 백성, 그래서 제 한 몸뚱이만 믿고 꽤 거칠게 살아왔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대해 대체로 입을 다문다.

달리 말하면 ‘놈놈놈’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이뤄진 영화다. 세 인물의 이력뿐 아니라 줄거리 역시 중요하지 않다. 보물지도가 추격전의 원인으로 제공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세 인물에게, 또 관객에게 맥거핀, 즉 일종의 영화적 미끼다. 주제로 치면 일확천금의 허무한 욕망을 상징하는 셈이다.

사실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데 탑승 안내서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다만 이 영화에서 거슬리는 것은 빈약한 이야기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간략화된 이야기 일부가 편집과정에서 깨끗이 제거되지 않고 잔해처럼 남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도의 행방을 둘러싼 혼선, 독립군과 도원의 미묘한 관계 등이 듬성듬성 노출되며 영화 전체의 찰기를 떨어뜨린다. ‘놈놈놈’의 성취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영화의 큰 틀 바깥에 있는, 즉 앞서 소개되지 않았던 세력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총질에 가세하는 것도 비슷한 예다. 올해 충무로 최대 기대작으로 꼽혀온 ‘놈놈놈’이 한껏 높아진 눈높이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이는 영화의 볼거리 문제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클 듯하다. 15세 관람가.

이후남 기자



“쾌감 + 긴장감의 세 캐릭터 촬영 내내 균형 맞추려 고심”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놈놈놈’

“발화-점화-산화.” 영화감독의 역할을 두고 ‘놈놈놈’의 김지운(44·사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 내륙의 가혹한 여건에서 배우·스태프의 열정을 모아낸 제작과정, 대평원을 질주하는 쾌감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이 영화 자체를 함축하는 듯 들렸다.

-세 캐릭터를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1960년대 서부극(본래는 ‘이상한 놈’ 대신 ‘추한 놈’이다) 제목에서 따왔는데.

“어려서 그 영화를 처음 보고 놀란 게 주인공이 미국 정통 서부극의 정의로운 영웅과 달리 ‘인간 말종’이라는 점이었다. 좋은 놈은 없고 추하고 비정한 놈뿐이다. ‘놈놈놈’의 좋은 놈, 나쁜 놈도 악당들 세계의 캐릭터 구분이지 보편적인 선인·악인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캐릭터를 주고받는다. 좋은 놈이 나쁜 놈 같기도 하고, 나쁜 놈이 이상한 놈 같기도 하다. 이상한 놈인 태구가 (마치 좋은 놈처럼) 자기 목숨보다 먼저 어린아이들을 구하는 장면이 거듭 나오지 않나. 제목은 세 캐릭터가 결말에서 맞이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나쁜 놈 창이는 나쁜 결말을 맞는다.

“창이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이다. 한때 귀족이었는데 쇠락한 인물, 흡사 말썽 많은 도련님이라고나 할까. 이병헌이 그런 감성적 연기에는 독보적이다. 도원과 태구가 액션과 유머로 활동사진 같은 쾌감을 준다면, 창이는 전반부 드라마의 긴장을 이끄는 역할이다. 촬영 내내 세 캐릭터의 균형에 고심했다. 칸영화제 상영본보다 국내 개봉판이 더 균형감 있다.”

-세 인물은 항일·친일과 거리가 있다. 어디서 왔는지 내력도 없다. 무정부적 분위기다.

“어디 의존할 데 없이 자기만을 믿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살아가는 처절한 상태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없다. 미래의 꿈을 얘기한들 부질없고, 또 온전히 전달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허무감이다. 그런 인간들이 지도 하나에 올인해 강력한 자기최면을 걸고 마치 로또 대박처럼 환상을 좇는다. 영화 전체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느낌이었으면 싶었다.”

-이야기 연결고리에 누락된 부분이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 있는지 주변에 계속 물었다. 이해가 된다고 하면 ‘달리자’고 했다. 편집뿐 아니라 촬영현장에서도 그랬다. ‘달려, 달려, 힘차게’가 제일 많이 쓴 말이다. (세 인물의)인생이 지긋지긋한 욕망의 추격전이다. 그 사이의 징검다리가 튼실한 느낌은 아니라도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이야기보다) 시청각적 오락을 극단화한 블록버스터다.”

글=이후남 기자, 사진=이영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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