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세계] 큰손 고객들 일상까지 챙기는 충실한 ‘집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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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하나대투증권 웰스매니즈먼트(WM)팀 권이재 부부장은 금융자산관리사에 대해 한마디로 ‘집사’라고 정의했다. 단순한 금융상품 판매나 돈 관리로 역할이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역할 차이가 전통적인 뱅커와 금융자산관리사를 구분짓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사실 금융자산관리사라는 직업은 딱히 없다. 하지만 금융사마다 큰손 고객의 금융자산을 관리하는 별도의 지점과 직원들을 따로 두고 있다. 은행이나 증권사에선 프라이빗 뱅커(Private Banker·PB), 보험회사에서는 파이낸셜 플래너(Financial Planner·FP)라 부른다.


◇고객의 일상까지 책임진다=보통 PB들이 상대하는 고객은 부동산을 제외한 금융자산이 10억원 이상인 사람이다. 삼성증권 명동지점 유태우 마스터 PB는 1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관리한다. 그는 고객을 만나면 우선 투자성향부터 파악한다. 공격적 성향이냐, 안전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고객유형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적절한 포트폴리오를 짜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매일같이 고객의 수익률을 점검하고 상품이나 투자방향을 물어오는 고객과 상담하는 일도 일과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얼마 전 그는 60대 고객의 노총각 아들을 위해 맞선을 주선했다.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안 간 아들이 있다는 고객의 말을 듣고 주저 없이 나선 것이다. 가끔 지방에 땅을 보러 가자는 고객 전화를 받고 곧장 차를 몰고 떠나기도 하고, 자녀 유학을 준비하는 고객을 위해 한 달 내내 미국 대학 사이트를 뒤진 적도 있다.

PB는 이처럼 고객의 자산뿐 아니라 가정사까지 챙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궁극적으로 자산관리의 목표는 고객이 세상을 뜰 때까지 맡긴 재산을 잘 관리하는 것이고, 그 후에는 다음 대로 상속하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정성을 다하다 보니 가정사에까지 깊숙이 끼게 된다는 것이다.

◇영역 구분 사라져=최근 들어 투자대상이 확 넓어지고 고객의 금융지식도 높아지면서 PB도 바빠졌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투자하는 상품이 많다 보니 멀리 아프리카 국가의 경제상황까지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세무와 부동산 지식은 기본이다. 심지어 그림과 와인까지 투자대상으로 들어오면서 그쪽 방면에 대한 지식도 중요해졌다. 물론 회사에서 각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입문 교육은 받는다.

하지만 좀 더 깊은 지식을 쌓기 위해 자비를 들이고 시간을 쪼개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각 분야의 전문가를 연결해주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하나대투증권 권 부부장은 “얼마나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느냐가 PB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라고 말했다. 포트폴리오 투자를 중시하다 보니 PB가 속한 금융사의 상품만 알아서는 곤란하다.

은행 PB는 펀드 특성을 꿰고 있어야 하고 증권 PB는 좋은 보험상품에 대한 지식도 갖춰야 한다. 보험 FP는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알고 있어야 한다. 금융기관 간 업무영역 구분이 사라진 셈이다.

◇스트레스 관리부터=PB라는 독립적인 직업이 없기 때문에 PB가 되려면 우선 금융회사에 입사해야 한다. 그러고도 많은 경험을 쌓은 다음에야 고액 자산가만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PB가 될 수 있다.

투자상담사나 공인재무설계사(CFP), 금융자산관리사(FP) 같은 금융 관련 자격증을 따는 것이 입사에 도움이 된다. PB는 고객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만큼 좋은 투자기회를 빨리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현직 PB들은 가장 필요한 능력으로 ‘새로운 금융지식 습득 능력’을 꼽았다. 하지만 수익률뿐만 아니라 고객과의 꾸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 PB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아울러 스트레스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 삼성증권 유태우 PB는 “고객재산을 관리하다 보면 고수익을 올릴 때도 있지만 불가피하게 손실을 볼 때도 있다”며 “변동성이 높은 쪽에 투자를 하게 된다면 고객재산을 몽땅 날리지 않기 위해서는 PB 스스로 수익률로 인한 스트레스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글=최현철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자료 협조: 인크루트 www.incruit.com


■선배 한마디 / 굿모닝신한증권 명품PB 현주미 강남센터장
“고객이 인생 동반자로 느낄 때까지 교류·대화해야”

굿모닝신한증권 명품PB 강남센터의 현주미(사진) 센터장은 20년 전 증권사에 처음 입사해 만난 고객을 아직도 관리하고 있다. 당시 1000만원이 안 되는 소액을 맡았지만 지금은 200억원이 넘는 전 재산을 맡아 관리해 준다. 그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 재산 상태는 물론이고 집안일까지 의논하며 신뢰를 쌓은 결과다. 그는 “고객이 인생의 동반자라고 느낄 정도로 끊임없이 교류하고 대화하는 것이 PB의 업무”라고 말했다.

-PB와 일반 금융사 직원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보통 금융사 직원들은 금융상품을 팔지만 PB는 포트폴리오를 판다. 보통은 상품을 잘 파는 방법을 궁리하지만 PB는 그 상품이 고객의 성향에 맞는지를 먼저 고민한다.”

-하루의 생활도 다른 직원과 다를 것 같다.

“고객의 경조사는 기본이고 집안 행사, 자녀 유학, 취미생활까지 챙긴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에 앉아 있는 때보다 고객을 만나기 위해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다.”

-상대하는 고객의 성향은 어떤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10억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소유해야 한다는 기본 조건은 비슷하지만 증권사를 찾는 고객이다 보니 아무래도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투자 성향이 강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강북 쪽 고객은 남자가 많고 검소하며 아끼는 것을 중시하는 반면, 강남 고객은 여성이나 부부 동반인 경우가 많고 현실에서 부를 즐기려는 성향이 강하다.”

-고객을 상대하면서 어려운 점은 뭔가.

“처음 찾아오는 고객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보통 고액 재산가들은 처음엔 여러 금융사에 몇 억원씩 맡겨 시험을 해본다. 그중 마음에 드는 PB가 생기면 전 재산을 맡기는 식이다. 그분들은 저 PB가 얼마나 수익을 잘 내느냐 보다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를 더 따진다. 항상 성심으로 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금융상품은 물론이고 그림과 와인·명품·수입차·갤러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식 이상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PB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해준다면.

“특별한 재주로 잠시 반짝수익을 낼 수는 있지만 그게 꾸준히 지속되기는 어렵다. 긴 시간 같은 고객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성실함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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