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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림씨일행 미국행 배경-北 강한 반발에 관련國 개입꺼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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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국정부가 21일 성혜림(成蕙琳)씨 일행의 한국행을 더 이상「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이들의 망명기도는 새 국면을 맞게 됐다.
당사자들이 20여일 이상 모습을 감춘 상태에서 여전히 미궁속에 빠져 있는 「성혜림씨 사건」의 성격과 변수및 앞으로의 전개방향등을 서울.워싱턴.파리등지의 관련소식통의 정보제공을 토대로종합한다.
◇삐걱거렸던 출발=成씨 일행의 망명기도는 시작부터 휘청거렸다고 할 수 있다.망명사건의 「주도자」와 「주역」이 서로 어긋나는 데서 문제는 발생했다.상황을 종합하면 이 일을 추진한 사람은 언니인 성혜랑(成蕙琅)씨였다.성혜림씨는 처음부 터 소극적인처지에서 「끌려다니는 입장」이었다.
한국행 망명에서 특별히 얻을 것이 많지 않은 成씨는 따라서 모스크바를 떠나는 순간부터 동요하기 시작됐다.
망명이 성사됐을 경우 뒤따를 부담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북한의 보복위협은 물론 평양에 남겨둔 아들 김정남의 장래에 대한우려등 어느 것 하나 쉽게 떨쳐 버릴 사안이 못됐다.
◇망명 지연=보통의 망명자들은 부자유스런 상태만 벗어나면 즉각 도착한 나라의 당국에 신변보호를 요청,망명절차를 밟는다.이경우 유엔기구등을 통해 망명의사만 객관적으로 확인되면 망명이 허용된다.망명에 보통 2~3일 길어야 1주일을 안넘기는 것이 「정상」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成씨일행의 경우 주역이 흔들리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성혜림씨가 주춤거리면서 일은 어렵게 돼갔다.본인의 확고한의사를 못얻어낸 이상 한국으로의 이송은 무리다.나중에 북한으로부터 어떤 반발이 초래될지 모르기 때문이다.成씨 일행으로부터 신변보호를 요청받은 제3국 입장에서도 섣불리 이들의 행방을 결정짓기 어려운 처지였다.
북한이 끼어든 것은 국내 언론이 이를 터뜨린 시점부터로 추정된다.북한 입장에서는 이들은 「자국민」이다.그것도 成씨는 「국모」격이다.이들의 신병을 확보한 제3국에 면담이나 신변의 원상회복등을 요구하고 「국모」운운 해가며 관련국에 유 .무형의 압력을 가했다는 소식통들의 얘기도 있다.
제3국은 한국과 북한사이에 끼여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자 어쩔수 없이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됐다.당연히 한국측은 成씨 일행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제3국에 넘겨줄 수밖에 없게됐다는것이다. ◇成씨일행의 유럽각국 이동=成씨 일행과의 직접 접촉을꾀하려는 북한과 이들을 북한으로부터 차단시키려는 한국간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스위스를 떠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인근 소도시인 버섬시등을전전한 끝에 헤이그등으로 옮긴 것도 이같은 추격과 따돌리기의 한 단면이다.
관계 소식통들은 『이들의 중간 기착지가 또 있었다』는 시사도하고 있다.한국으로 치면 도(道)경계 정도를 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유럽국들의 국경을 여러곳 넘나드는 사이에 한국과 북한은 「신병」과 「의사(意思)」확보전이 펼쳐졌다 는 것이다.
◇북한과 주변국 입장=成씨 일행에 대한 추적과 함께 북한은 이들이 체류하는 당사국은 물론 미.영.독.프랑스등 주변국들에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북한의 주장은 成씨 일행을 한국측에 넘겨주지 말라는 것과 최소한 공정한 제3자의 역할만을 하라는 것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이들 주변국이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주변국들 대다수가 이 사건에 깊숙이개입해 별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사건발생후 기민하게 반응했다가 북한의 보복선언 이후 관망자 입장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진 것도 똑같은 맥락이다.
◇최종 처리방향과 한국측 입장=소식통들에 따르면 성혜림씨는 시종일관 『한국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여왔던 것으로 집약된다.成씨는 또 북한을 의식한듯 『원래 망명을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식의 해명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 한국이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황에서 관심사는 이들의 최종 행선지다.우선 떠오르는 곳이 成씨가 당초 운을 뗐던 곳으로 알려진 미국이다.미국이 아니라면 대안은 유럽의 「어느 나라」 정도일뿐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는 상황이다.
成씨가 만의 하나라도 북한이나 모스크바등으로 「원대복귀」를 하겠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행선지는 거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으로 봐야 한다.다름아닌 미국행이라는 것이 소식통들의 지적이다.
成씨 입장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북한의 영향아래 있는 아들의 장래문제와 자신의 신변안전이다.북한의 비위를 가장 덜 거슬리면서 자신의 안전을 최대로 보장받을 「절충점」으로 손꼽을 만한 곳은 현시점에서 미국밖에 없다.
언니인 성혜랑씨및 다른 일행들도 비슷한 처지다.유럽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언제 북한이 손을 뻗칠지 모른다.특히 성혜랑씨는명시적으로 한국행을 원했다.한국을 제외한 상태에서 그나마 기댈곳은 미국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음직하다.
한국 입장에서도 내심으로는 이들의 미국행을 원할 듯싶다.당초성혜랑씨등 일부는 한국으로 데려올 수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있다.그러나 한국 입장에서는 이같은 「부분 망명」이 바람직한 모양새가 아니다.성혜림씨가 빠진 상태에서 이들 일행의 한국망명은 득(得)보다는 실(失)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북한이 그나마 넘볼 수 없는 미국으로 가게 하는 것이 한국의불안을 덜어줄 차선책인 것이다.이같은 식으로 유추해볼 때 이제공은 미국쪽으로 넘어간 듯하다.
당초부터 미국은 이들에 대해 탐탁한 입장은 아니었다.북한과의관계개선등 여러 변수를 감안,가급적 멀리 떨어져 관망자세를 취해오던 미국이었다.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이 문제로 한반도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사자들이 미국을 지목하고 나선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외면만 할 수 있는 입장도 못된다.하지만 북한에 대한 부담은 역시 떨칠 수가 없다.
외교전문가들은 이같은 상황하에서 미국이 成씨 일행을 「망명이아닌 방문자」형태로 받는 방법을 하나의 대안으로 평가하고 있다.
워싱턴.파리=김용일 배명복.고대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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