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아산’만 쳐다보는 MB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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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을 논의하기 위한 정부합동대책반 회의가 13일 서울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서 열렸다. 홍양호 통일부 차관(右)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김경빈 기자]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뒤 이곳을 밟은 관광객은 173만여 명이다. 북한 관계자들도 농담 삼아 “이제 개성과 금강산은 남쪽 땅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정도로 금강산은 대표적인 남측의 관광지가 됐다. 하지만 정부의 안전조치는 금강산 관광객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부실했다.

◇현대아산에만 맡겨진 안전=2000년 21만3000여 명이었던 금강산 관광객은 지난해 34만5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관광객이 느는 만큼 ‘회식 중 추락사’(2006년 1월), ‘관광버스 전복’(2007년 7월), ‘버스 추락 사고’(2007년 10월) 등의 사건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해결할 세부적인 규정이나 제도적 장치는 미흡했다.

2004년 1월 남북이 ‘남북 당국 간 금강산 지구 출입·체류에 관한 합의서’를 만들었지만 이를 구체화해 어떤 절차로 누가, 어떻게 책임지는지에 대한 ‘공동위원회 구성’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각종 사고는 대부분 현대아산과 북측의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이 협의해 해결해 왔다. 정부는 금강산 관광이 민간 사업인 점을 내세워 현대아산이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식으로 맡겼던 셈이다. 2005년 12월 금강산에서 현대그룹 협력체 직원이 음주운전으로 북한 경비병을 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현대그룹 측이 보상금을 지급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지난 정부가 금강산 관광을 평화의 상징으로 강조하며 관광의 외연 확대에 치중한 측면이 컸다면, 새 정부는 출범 초기 ‘대북 무대응 전략’과 ‘경제성’을 부각하며 금강산 관광의 제반 안전조치와 미래를 고민하지 않았다. 남북은 올 2월 체계적인 금강산 관광 관리를 위해 “이른 시일 내에 금강산 관리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한다”고 합의했지만 대화가 중단되며 진전이 없다. 특히 북한이 3월 말 우리 당국자들을 추방시킨 뒤에는 현장 확인조차 불가능한 ‘공백 상태’가 지속돼 왔다. 남측 관광객의 피격 사망이라는 전례 없는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북한이 대화를 계속 거부할 경우 이런 상황은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총격 사망 책임 어떻게 묻나=정부는 13일 통일부 대변인 명의로 발표한 성명에서 “출입·체류에 관한 합의서에 따르면 총격으로 사망케 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합의서 10조는 “북측은 (남측) 인원의 신체, 주거, 개인재산의 불가침권을 보장한다’며 ‘(남측) 인원이 법 질서를 위반했을 경우 북측은 이를 중지시킨 후 조사하고 위반 정도에 따라 경고, 범칙금 부과, 추방 조치를 취한다’고 돼 있다.

이에 따르면 군사통제구역에 진입했다는 이유로 총격을 가한 건 명백한 합의서 위반이라는게 통일부의 해석이다. 그러나 이 책임을 어떻게 따질지에 대한 후속 규정은 없다. 후속 규정이 없다 보니 오히려 북한이 “관광지구 바깥에서 일어난 일로 우리 측 형법·군법 적용 대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

◇당국 간 진상 규명 채널 먹통=정부는 12일 오전 판문점 남북 연락관의 첫 전화 통화에서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전화통지문을 보내겠다고 밝혔다. “(상부 입장을) 확인해 보겠다”던 북측 연락관과의 접촉은 이후 두절됐다. 통일부의 한 간부는 “신호는 가는데 아예 수화기를 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날 저녁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통해 박왕자씨 사망의 책임을 남측에 전가하고,현지 조사를 공식 거부했다.

북한이 태도를 바꿔 조사를 수용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매우 작다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북한 내부에서도 강성인 군부에 비해 남측 분위기에 상대적으로 익숙한 ‘대남통’들은 새 정부 출범을 전후해 공개 석상에서 사라졌다. 대표적 대남 채널이던 최승철 통일전선부 부부장, 정운업 민족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권호웅 내각참사는 숙청됐다는 게 정보 소식통들의 분석이다. 여권의 핵심 관계자는 “현재 북한 대남 라인의 90%가 숙청당해 우리도 라인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의 대화 거부와 북한 내 대남 채널의 몰락으로 금강산을 실제 관리하는 강성 군부의 대결 노선을 막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진상 규명은 12일 방북한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 일행이 북측 인사들의 설명만 듣고 이를 정부와 국민에게 전달하는 ‘중계 조사’로 그칠 가능성이 커졌다.

채병건·정용수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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