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 시시각각

민주당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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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통합민주당이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다. 마침내 민주당이 돌아온 것이다.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의 곡절을 거쳐 결국 돌아왔다. 소리를 지르며 집을 나간 아들이 세상의 쓴맛을 보고 어머니에게 돌아오듯 그렇게 돌아왔다. 돌아온 민주당은 81석의 초라한 모습이다. 1980년대 이래 제1 야당 의석이 집권당의 절반도 되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주당은 당명의 기운을 빌려 부활을 꾀한다. 그러나 화장을 고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민주당에는 ‘르네상스’가 필요하다.

한국인에게 민주당이란 이름에는 첫사랑 같은 향수가 있다. 80년대 중반 5공 군사독재가 거친 숨을 내쉴 때 신한민주당은 국민의 희망이자 안식처였다. 그 이름에 국민의 가슴은 뛰었고 열정은 85년 12대 총선으로 폭발했다. 87년 대선의 길목에서 신한민주당은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DJ)의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섰다. 대권이란 유산 앞에서 형제가 의절한 것이다. 90년 YS는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JP)의 신민주공화당과 합쳤다. 3당 합당으로 YS는 민주당이란 역사의 호적에서 자기 이름을 지웠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대변인을 지냈다. 그는 최근 “3당 합당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합당 18년 만의 일이다.

3당 합당은 범죄에 가까운 배반이었다. 경북·경남·충청 세력이 유권자를 완전히 무시하고 호남 세력을 국토의 한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내각제 밀약까지 있었다. 호남은 비명을 질렀고 지역감정은 날을 세웠다. 90년 10월 DJ는 내각제 포기와 지방자치제 이행을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했다. 13일만에 DJ는 병원에 실려갔고 정권은 결국 이듬해 내각제를 포기했다. 훗날 대통령이 된 후 DJ는 세 아들의 비리로 국민의 신임을 많이 잃었지만 90년 그때만 해도 국민은 가까이 있었다. 합쳐진 3당은 세상을 다 얻었다 싶었지만 국민은 민주당을 지켜주었다. 92년 총선에서 거대여당 민자당은 과반 아래(149석)로 쪼그라들었고 민주당은 97석으로 커졌다. 97년 민주당은 드디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5년 뒤 열린우리당의 가출로 민주당이란 이름엔 자상(刺傷)이 생겼다.

권력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국민은 민주당의 우산이 되어주었다. 비바람이 그쳤으니 민주당은 은혜를 갚아야 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어설픈 이념투쟁으로 우산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결국 정권과 의석을 놓쳤고 이제 새 출발을 하겠다며 국민 앞에 섰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헝클어지고 바지엔 흙투성이다. 그들은 가출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지난 10년 그들의 정권이 민주정권이었듯이 이명박 정권도 민주정권이다. 압도적인 표차로 국민이 뽑아준 정통성의 정권이다. 민주당은 선거에서 졌다. 성숙한 제1 야당이 되려면 정권을 인정하고 실력과 정책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런데도 민주당엔 아직도 이념의 치기(稚氣)가 잔뜩 남아있다. 불법 폭력시위대가 공권력과 언론과 민주주의를 때려부순 현장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시위대 맨 앞에 섰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 불법의 토성(土城) 위에 올라가 시위대를 격려했다. 지난 11일 이명박 대통령이 본회의장에 입장하고 연설할 때 대다수 민주당 의원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이라크 주둔에 반대해도 미국의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 대통령의 연설에 박수를 친다. 민주당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젊은 여자와 성적 일탈 행위를 벌였어도 공화당 의원들은 그의 연설에 박수를 쳤다. 한국에선 대통령이 연설할 때 민주당 의원 수십 명이 빨간 넥타이와 스카프를 매었다니 국회가 시청 앞 광장인가. 14~16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르네상스는 신에게 눌려 있던 인간을 찾자는 문화운동이었다. 민주당은 이념에 눌려 있는 민생을 찾아야 한다. 민주당의 르네상스는 가능할까. 누가 주도할 것인가.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