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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연기 주문하려면 본인 허락에 수당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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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공연예술의 메카 영국 런던에서는 불과 40년전까지만 해도 인체의 은밀한 부분은 공공 장소에서 보여주는 게 금지됐다. 여성의 나체를 보는 것은 결혼한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런던 무대에 여성이 처음 출연한 것은 1620년대. 당시 여성 연기자는 무대에서 ‘우우’하는 야유와 함께 썩은 과일 세례를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누드 연기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영국은 1737년부터 1968년까지 런던의 극장에서 상연되는 모든 공연물은 궁내부 장관의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궁내부 장관은 반기독교적 정서를 담고 있거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내용을 담은 연극ㆍ무용ㆍ오페라 등은 상연금지 조치를 취했다. 동성애를 암시하는 대사도 불가능했다. 나체 출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 ‘살로메’도 런던 초연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궁내부 장관의 검열 때문에 결국 프랑스어로 먼저 출판이 된 다음 영어로 번역됐고 1896년 파리에서 먼저 초연됐다. 영국 초연은 1931년에나 이뤄졌다.

궁내부 장관의 검열망을 교묘하게 피해간 사람도 있었다. 1931년 ‘윈드밀 시어터’을 개관해 누드 차림의 젊은 여성을 출연시킨 과부 출신의 로라 헨더슨(1864∼1944)이다. 그는 흥행업자 비비안 반 담에게 극장 경영을 맡겼다. 이 두 사람은 미술관에 벌거벗은 여자들의 조각상이 많다는 사실에 착안해 무대 위에서 부동 자세로 서 있는 누드 차림의 여성이 조각상보다 더 에로틱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궁내부 장관도 누드로 출연한 여성이 무대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공연을 허가했다. 가끔씩은 누드 차림의 여성이 조각상처럼 서있다가 재채기를 하거나 다른 무용수들이 치는 바람에 넘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주의를 받긴 했지만 극장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문을 닫지 않았다.

1968년 9월 26일 영국 궁내부 장관은 공연물에 대한 사전 검열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치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이튿날 런던 샵스버리 극장에서는 출연진 전원이 누드로 나오는 록 뮤지컬 ‘헤어(Hair)’의 막이 올랐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하는 히피 스타일의 반전 뮤지컬이었다. 1969년에는 남녀 출연진 전원이 벗고 나오는 뮤지컬 ‘오 캘커타’가 등장했다.

올 9월 10일까지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 중인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는 엘크 나이트하트가 연출을 맡았다. 주인공은 호화 파티를 열어 많은 여성과 잠자리를 하면서 마약까지 복용하는 난봉꾼으로 나온다. 돈 조반니 역으로 출연한 헝가리 출신 베이스 가보 브레츠는 살색 끈 팬티만 달랑 걸치고 무대에 등장해 샤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3년 네덜란드의 여성 연출가 코리나 반 아이크가 호주에 수출한 오페라 ‘리골레토’에는 만토바 공작이 전라로 출연했다. 1973년 벨기에 출신의 연출가 모리스 베자르가 현대 버전으로 선보인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파티 장면에서 히피 스타일의 장발족이 벌거벗고 무대를 누비고 다녔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라인의 황금’에서 라인강의 여신 3명이 누드로 출연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2007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연출가로 데뷔한 볼프강 바그너의 딸 카타리나 바그너는 ‘마이스터징어’에서 남성 출연자는 누드로, 여성 출연자는 아랫도리만 입힌 채 무대에 내보냈다.

2007년 9월 뉴욕 링컨센터에서 상연된 뉴욕 시티 오페라의 쇤베르크 ‘모세와 아론’에서 여성 합창단원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이집트를 탈출해 사막을 통과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처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대목에서다.

2005년 스위스 제네바 그랑 테아트르에서 상연된 바그너의 ‘탄호이저’에선 남성 포르노 스타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에서 에로 배우로 활약 중인 에르베 피에르 귀스타브가 제우스 신이 황소로 변장해 에우로파를 겁탈하는 장면에서 벌거벗은 제우스 역으로 나왔다. ‘탄호이저’의 누드 버전은 올 2월 LA 오페라에서도 상연됐다. 티켓에는 ‘청소년은 관람을 삼가세요. 누드 장면과 강도 높은 성적인 묘사가 등장합니다’라는 경고문이 실렸다.

국내에서 주연급 성악가가 전라로 출연하는 오페라는 거의 없다. 간혹 누드 모델이 투입될 뿐이다. 푸치니의 ‘라보엠’ 4막에서 화가 마르첼로가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1996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 공연에서는 누드 모델이 출연해 뒷모습을 보여줬다. 2005년 성남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에서도 누드 모델 3명이 전라로 출연했다. 200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상연된 헨델의 ‘리날도’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여성 무용수들이 가슴을 드러낸 채 무대를 누볐다.

오페라 개막 전부터 누드가 등장한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매표에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품은 전체적으로 허술하게 만들어 놓고 단지 누드 하나 만으로 표를 팔기 위해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다면 관객들은 실망감만 느낄 게 분명하다.


영국과 미국에선 배우 조합의 규정에 따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누드 오디션을 할 수 없다. 누드 연기는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미리 본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누드 장면의 카메라 촬영은 금지다. 비디오 촬영 후엔 누드 부분을 따로 편집해야 한다. 무대에서 실제 성행위를 하는 것도 금지다(물론 성행위를 가장한 연기는 무방하다). 누드 차림으로 공연 중일 때는 어떤 관객도 백스테이지에 들어올 수 없다. 또 누드 출연 때는 출연료와 별도의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이들 규정을 어길 경우 일주일치 이하의 출연료를 지급해야 하고 배우조합이나 연기자는 제작자에게 별도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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