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방송출연기>"이화에 월백하고"출연 주부 방경숙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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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지금부터 6년전 KBS-2TV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드라마가 있었다.당시 서실경력 6년의 나는 사모하던 선비를 떠나보내게된 기생이 시를 쓰는 장면에서 글씨를 대신 써주는 역을 맡게되었다. 비록 손만이지만 첫 출연이라 제일 좋은 붓에 제일 좋은 화선지를 골라들고 녹화장으로 갔다.
그러나 담당 PD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옛날에 이렇게 좋은재료가 어디 있어요』라며 야단치는 것이 아닌가.그 PD는 『고증까지 받아 어렵게 구했다』며 낡고 몽당비같은 붓에 닥풀이 박히고 기름묻은 종이를 내주었다.
녹화가 시작되고 불은 대낮같이 밝은데 사람들은 왜 그리 많이모였는지….카메라가 손등 위를 바로 비추는데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생각과는 달리 작은 글씨로 쓰라고 해 마음은 급해지고 붓은 어색하고 땀은 비오듯 했다.PD가 『스탠바이 큐』만 하면 잘 있던 손이 마치 중풍환자 손처럼 와들와들 떨렸다.
『NG.』PD는 연습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하라며 위로했다.
그러나 좋은 말도 한두번.자꾸 NG를 내자 처음엔 부드럽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이게 마지막 화선지입니다.이것마저 망치면 이 드라마 못나갑니다.』마지막엔 아예 애원반 협박반이었다. 『에이,NG.』그 소리에 깜짝 놀라 붓을 땅에 떨어뜨렸다.
내 자신이 먼저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였다.『야,소주 한병 가져와.』 술을 전혀 못마신다는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한잔 들면 용기가 나고 떨리지도 않을것』이라는 협박아닌 협박에 코를 쥐고 한잔을 꿀떡 삼켰다.거짓말같이 마음이 진정됐다.녹화를 마치고는 도망치듯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흘끗흘끗 쳐다보는 사람들 시선에 아직도 극중의상(누더기 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집에와서 나중에 TV를 보고 글씨 쓰는 내 손이 그렇게 예쁜 줄은 처음 알았다.주위에서 한턱내라는 바람에 출연료의10배이상 지출됐다.
그뒤 서울인사동필방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웬 여자가 TV에나와 글씨를 쓰는데 참 잘쓰더라』하기에 『그게 저예요』라는 소리를 가까스로 참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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