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북한 難民사태에도 대비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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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 얘기다.공단 근로자들을 진찰하다 납중독 사실을 발견,이를 언론에 발설했던 한 의대교수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그후 그는 근로자들의 코가 뚤렸건,손이 뭉크러졌건 어떤 직업병이라도 일절 기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70년대 고도 경제성장의 그늘에 묻힌 얘기가 어찌 이 뿐일까.밖으로 「한강의 기적」만을 얘기해야 했을 때 소외된 「난쟁이」집단을 슬퍼했던 문인.지식인들은 모두가 이적(利敵)행위자들이었다.생활고로 자살하고,공장에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범죄가 횡행하고….빈곤.자살.범죄.윤락.장애인 문제등 당시 숱한 사회문제가 발생했어도 언론은 보도에 조심해야 했다.
사실 남한 신문에 한줄 난 그런 기사는 북한 노동신문에 곧바로 대서특필되던 때기도 했다.70년대 뿐이 아니다.80년대 5공 내내도 그랬다.80년대 후반 민주화와 경제성장으로 이젠 체제싸움에 승패가 갈렸다고 판단되면서 비로소 정부도 ,언론도 사회의 치부(恥部)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사회통계 하나 있을리 없었다.80년대 중반까지 국제노동기구(ILO)의 소득보장 국제자료에서 한국통계는 「믿을 수 없음(unreliable)」딱지가 붙여졌었다.
최근 북한 김정일(金正日)의 전처 성혜림(成蕙琳)씨 일행의 탈출등 북한인 망명사태와 함께 대량 난민,북한체제의 붕괴등이 심각한 현실문제로 다가서고 있다.만약 북한 주민의 대량 월남사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과연 우리사회가 무리 없이 견뎌낼수 있을까.
개인소득 1만달러.70년대의 그같은 비정함을 딛고 우리경제는정말 눈부신 성장을 달성했다.한쪽은 굶어 내려오고….결국 체제싸움에서 승리했다.그러나 놀라운 경제성장 뒤켠에 숨겨진 취약한사회복지.그 속에서 빈부의 세습화가 시작되고 사치와 허영,다른한쪽에선 범죄.마약.청소년 비행등 소외계층이 뿜어내는 독소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다.
우리의 경제력을 믿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다.공장에 근로자가 모자라 외국인을 데려다 쓰고,농촌에 일손이 모자란데 웬만한 북한난민수 정도는 소화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정부도 3천억원의 자금을 준 비하고 적십자도 대비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한동안은 자유와 안정속에 감사하던 북한동포들이 화려한네온사인 뒤로 숨겨진 우리사회의 취약성을 보며 점차 어떤 느낌을 가질까.마냥 감사하기만 할까.
현실로 다가오는 「통일시대」를 보며 우리가 무엇보다 시급히 해야 할 것은 경제성장을 위해 흘리는 땀 못지않게 소외계층을 향한 따뜻한 배려다.그것은 다름아닌 사회 도덕성 회복이다.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인 이기심.비정함을 극복해낸 사회 모습을 북한동포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국민들은 이를 국가의 정책으로,민간복지에의 참여로 보완했다.성장과 분배의 선택(trade-off)이 아니다.국가의 여건에 따라 때로는 정부가,때로는 민간이 앞장서소외계층을 돌보았다.
구미국가들에서 의료보험.노령연금과 같은 국가의 사회보장제도,민간의 조직화된 자원봉사,공동모금이 시작된 것은 이미 19세기말이다.소득 1만달러를 달성했던 그들의 70년대가 아니다.
정부는 복지정책의 폭을 시급히 더 늘려야 한다.최근 국민복지기획단의 청사진도 영세민 대책에선 부족한 점이 많다.최소한 의료.복지서비스의 폭을 더 넓혀야 한다.그리고 국민들도 나서야 한다.잘 조직화된 자원봉사.모금운동이 타올라야 한 다.
남북한 주민들의 「충돌적 만남」,그 만남이 또 다른 비극이 되지 않기 위해선 정부도,국민도 서둘러야 한다.사회를 청소하고소외된 이웃에 가슴을 여는 「훈련」을 해야 한다.그것이 진짜 준비다.
이창호 자원봉사사무국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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