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바둑 명인열전 ② 김옥균과 함께 사라진 ‘부목반’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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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선 말기의 풍운아 김옥균과 본인방 슈에이(秀榮)의 우정은 각별했다. 한쪽은 나라를 개혁시키려다 실패하고 이역만리를 떠도는 망명객, 다른 한쪽은 쓰러져 가는 바둑의 종가를 바라보며 비탄에 잠긴 젊은 본인방. 의협심이 강하고 예도를 숭상했던 슈에이는 김옥균을 만나자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이 우정이 바둑과 천리나 멀어진 채 하루 세끼를 걱정하던 슈샤이(秀哉)를 본인방가(家)로 인도하고 우여곡절 끝에 21대 본인방이 된 슈사이가 일본 바둑을 중흥시키는 과정을 보면 그 기막힌 인연에 저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김옥균은 처음엔 일본 정부로부터 환대를 받았으나 차츰 눈엣가시가 되더니 기어이 홋카이도(北海道)로 유배된다. 이때 슈에이는 요코하마의 뱃전에 올라 석별의 정을 나누다가 차마 내리지 못하고 홋카이도까지 가버린다. 김옥균이 다시 남쪽 절해의 고도인 오가사와라(小笠原) 섬에 유배됐을 때도 슈에이는 이곳까지 찾아간 유일한 인물이었다 (김옥균이 6점을 놓고 슈에이를 이긴 기보로 미루어 볼 때 김옥균의 실력은 아마추어 3~4단 정도로 추정된다).

김옥균은 부목반(浮木盤)의 실종과도 밀접하다. 부목반은 물 위에 뜨는 바둑판이란 뜻인데 1대 본인방 산샤(算砂) 이래 본인방가의 가보로 내려온 환상의 명반으로 전해진다. 슈사이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수였던 슈호(秀甫)는 주위에서 명인에 오르라고 하자 낯을 붉히며 거절했던 괴걸이지만 본인방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이 판을 치켜들고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

한데 슈에이는 어찌 된 일인지 이 부목반을 김옥균의 처소로 보냈는데 김옥균은 공교롭게도 이 직후 상하이로 유인되어 자객 홍종우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만다. 이때 김옥균의 출국과 함께 부목반도 영영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부목반 실종 사건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일반 바둑판은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물에 뜨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바둑판 중 일부는 속을 비게 만들고 거기에 철 선을 넣어 바둑돌을 놓으면 소리가 나도록 제작했다. 만일 부목반이 조선에서 건너간 바둑판이라면 물에 뜰 수 있고 그 판이 김옥균에게 전달된 사연도 약간이나마 수긍하게 된다. 이 문제는 복잡하고 민감한 만큼 후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담백한 슈에이는 족보도 없고 이익에 민감한 슈샤이(본명 다무라 호주)를 골칫덩이라 보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김옥균이 재차 설득하자 문하로 받아들이고 시험기를 거쳐 초단 면장도 없는 슈사이에게 단번에 4단을 준다. 슈에이는 이때만 해도 궁지에 몰린 큰 새가 자진해서 자신의 품으로 날아든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이로부터 18년 후, 슈에이는 명인에 오르더니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후계자를 놓고 슈사이와 또 한 명의 고수 가리가네(雁金準一) 사이에 치열한 계승 다툼이 벌어진다. 여기서 이겨 21대 본인방이 된 슈샤이는 도전해 오는 적수들을 연파하며 승승장구하더니 1914년, 41세의 나이로 명인에 추대된다(40세 명인이 진정한 명인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일까).

이 무렵 일본 바둑계는 정부가 바둑의 권부라 할 기소를 폐지하고 종가 제도를 와해시키자 중심을 잃고 사분오열 상태로 빠져들었다. 막부시대 300년을 장식했던 바둑 4가문 중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본인방가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신생 조직 들이 끝없이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도쿄의 바둑계도 잿더미가 되고 심한 경제적 궁핍에 빠져들자 이들은 서서히 대동단결을 생각하게 되었다. 1924년, 드디어 재계의 거물 오쿠라(大倉喜七郞)가 앞장서고 슈샤이가 뒤를 받쳐 마침내 일본기원이 발족되었다.

그러나 반대파인 가리가네 등이 새 단체를 차리고 일본기원에 대항전을 요구해 왔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들의 도전장을 지상에 게재했고 곧이어 회답이 나왔다. 세인의 고조된 인기 속에 드디어 대항전이 벌어졌는데 그 서전이 바로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슈사이-가리가네의 대결이다. 요미우리의 부수를 일약 3배로 끌어올린 이 대결은 꼬박 20일 만에 슈사이가 묘수로 불계승했다. 이때부터 신문사마다 흥미진진한 진검승부를 기획하게 됐고 신문 바둑이란 새로운 ‘장르’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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