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촛불보다 공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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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광화문에 촛불이 넘실대던 지난주 홍콩의 도널드 창 행정장관이 시민단체 회원 9명을 각 부서 국장(장관) 정치보좌관에 임명하는 일이 있었다. 노동과 복지는 물론이고 금융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부서에 보좌관이 임명됐는데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사건’이라 할 만했다. 물론 취지는 각 분야 민간 전문가들이 국장을 도와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행정장관이 시민단체에 잘 보이려고 쇼를 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보좌관 면면이 하나같이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꼬집었던 인사들이어서 비난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다음 날 그 배경이 알려지면서 비난은 찬사로 바뀌었다.

9명은 모두 홍콩의 30대 각 분야 전문직종 모임인 ‘30회’와 석·박사급 학생들이 주동하는 정책토론 모임인 ‘라운드 테이블(Round Table)’ 소속 회원들이다. 모두 정부 정책을 감시하고 잘못을 지적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 행동하겠다는 공동의 의지로 뭉친 시민들이다. 두 단체의 발족 동기는 같다. 2003년 홍콩은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창궐로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50여만 명이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서면서 사회가 극심한 혼란을 겪을 때였다. 정부가 사스 초기 대응을 못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며 반정부 여론도 비등했다. 이때 예일대 출신의 리뤼런이라는 변호사와 지인들 사이에 내 삶의 터전인 홍콩을 살리자는 의기투합이 있었다. 이렇게 30대 전문직종 종사자는 ‘30회’로, 석·박사급 학생들은 ‘라운드 테이블’로 모였다. 이들은 곧 방법론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낮에는 가두, 밤에는 촛불시위로 정부의 무능을 고발하고 민주화를 위해 중국과 일전을 불사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정부 각료들을 만나 실정을 따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다. 공부 대상은 잘못된 교과서 ‘홍콩’이었다. 각자 현장에서 보고 겪은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해 이를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어 교과서를 바꿔보자는 생각이었다. 정책연구와 대안제시로 홍콩의 가치관과 경쟁력을 높이는 게 가장 강력한 시위라는 공감대도 있었다. 대신 회원 모두 ‘견인견지(見仁見智)’의 마음을 놓지 않기로 했다. 각자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시야를 넓히자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다. 이렇게 지난 5년 동안 두 단체 회원은 10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들 중에는 금융·법률은 물론이고 물류·예술·의료·사회복지, 심지어 유흥업계 전문가까지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 6편의 각 분야 전문보고서가 나왔는데 육아와 빈부격차 문제 해소를 위한 정책보고서는 홍콩정부 내 싱크탱크 보고서보다 더 구체적이고 전문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절반 이상이 정책에 반영됐다. 창 장관이 보좌관 임명 자리에서 “시민단체의 전문성과 현장성에 홍콩의 미래가 있다”고 말한 이유다.

홍콩의 주권반환 기념일인 1일은 민주화 시위의 날이다. 지난 1일에도 4만여 명의 시민이 홍콩 중심부에 모여 중국정부를 향해 장관과 입법의원 직선제를 수용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물론 단 한 건의 폭력도 보고되지 않은 평화시위였다. 당시 시위현장에는 30회 핵심회원 원성 펑(금융인) 등 몇 명이 나와 시위를 지켜봤다. 이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시위에 참여한 것인가.”

“시민들이 무슨 불만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려 나왔다.”

“정부가 잘못하면 시위는 당연한 것 아닌가.”

“가장 강력한 시위는 정부가 모르는 현장의 문제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평화 시위도 반대하나.”

“나와 의견이 다르다 해서 무시해선 안 된다. 다만 더 나은 시위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서울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를 어떻게 보나.”

“시위할 시간에 참석자들이 토론을 거쳐 문제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는 게 국가발전에 더 이익 아닌가.”

최형규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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