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불이 난 목조주택서 16년전 실종 소녀 시신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낙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문학동네, 1권 448쪽, 2권 400쪽
각 권 1만2000원

#1. 2005년 4월 20일 새벽. 도쿄 아다치구, 오래된 목조주택이 밀집한 서민거주 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홀로 사는 이웃노인이 담배꽁초를 제대로 끄지 않아 인근 가옥 다섯 채를 태웠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화재 현장에서 16년 전에 실종신고 된 열다섯 살 소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소녀의 시신은 부모의 집 마룻바닥 아래 누워 있었다. 차고 습한 지하에서 소녀의 시체는 썩지 않았다. 시랍화(屍蠟化)된 상태, 빼어난 미소녀였던 여중생의 모습 그대로 그녀는 부모와 여동생이 사는 집 마룻바닥 아래 16년이나 묻혀 있었다. 부모는 경찰에 자백한다, 딸을 죽인 건 우리라고.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 그들은 처벌 대상이 아니다.

#2. 2005년 3월. 열두 살 소년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미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소년이 죽기 전 남긴 그림에는 가족들의 발 밑에 갇힌 소녀의 시체가 묘사돼 있었다. 소녀의 죽음, 부모의 은폐, 지독한 침묵의 16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몇 달 전의 그림이다. 무엇보다 그림을 그린 소년이 죽고 한 달 뒤에나 소녀의 죽음이 밝혀졌다. 소년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제3의 눈’을 가진 것이라 믿는다. 타인의 기억을 투시하는 능력.

#3. 1996년. 산장에 묻은 절단된 시체들. 태연히 자신의 범행을 매스컴에 떠들며 경찰과 유족을 희롱하는 연쇄 살인마. 프리랜서 르포작가 시게코는 자신이 추적했던 96년 ‘그 사건’의 악몽 속에서 9년을 버텼다. 이제 겨우 나아지려는 때. 소년의 어머니가 그녀를 찾아온다. 죽은 아들의 그림 속에 어떤 사연이 담긴 것인지, 예지능력의 비밀을 밝혀달라는 것. 거절하던 그녀는 소년이 남긴 또 한 장의 그림에 숨이 멎고 만다. 9년 전 그 살인 현장의 아주 작은 단서를 분명히 묘사한 그림이다. 세상 사람에겐 알려진 바 없는 장면을 소년은 직접 본 듯 그려냈다.

미야베 미유키가 또 한국 독자를 찾아왔다. 신작 『낙원』은 전작 『모방범』에서부터 9년이 흐른 시점에서 출발한다. 『모방범』의 등장인물 마에하타 시게코가 9년 전의 악몽과 싸우며 또 하나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타인의 비밀을 읽어내는 소년. 부모에게 죽임을 당해 16년간 집안에 매장됐던 소녀. 세상의 혼란 속에서 ‘가족’은 붕괴됐고 그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잔인하다. 읽는 내내 숨이 가쁘다. 900쪽에 달하는 두 권의 소설이 끝나는 순간, 작품 속에서는 비극이 끝나지만 독자의 공포는 시작된다. 누군가의 숨겨진 과거가, 끔찍한 비밀이 스멀스멀 전이돼 오는 느낌이다. 

배노필 기자

▶ 중앙일보 라이프스타일 섹션 '레인보우' 홈 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