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바둑 명인열전 ① 끝없는 승부 정신 … 일본 바둑 재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오늘의 바둑사를 만들어 온 인물들은 누구일까. 그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건을 엮은 바둑 이야기를 새로 연재한다. 연대순이 아닌 옛날과 현재를 오가며 자유롭게 서술하는 형식이다. 첫 번째로 일본의 마지막 본인방인 슈사이(秀哉) 명인을 골랐다.

슈사이(1874∼1940·사진)는 세습제도 최후의 본인방이며 최후의 명인이다. 불패의 명인, 불꽃의 명인으로도 불린다.

일본의 바둑사는 바둑의 권부라 할 명인 기소(棋所) 쟁취를 위한 바둑 4가문의 치열한 대결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부시대 설립된 바둑 4가문 중 가장 우뚝했던 가문이 본인방가다. 그러나 슈사이는 1936년, 21대를 이어온 본인방가의 세습제도를 폐지하고 본인방 명칭을 마이니치(每日)신문에 양도했고 마이니치신문은 본인방이란 이름을 걸고 선수권전을 연다. 이것이 본인방전의 시초이고 프로기전의 시초다. 바둑의 지평은 이로부터 크게 넓어졌고 메이지유신과 도쿄 대지진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던 일본 바둑은 다시 한번 크게 융성한다. 슈사이란 인물에 대해선 ‘비틀린 사람’이란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결단은 새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일본 바둑이 쇠퇴를 거듭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쟁을 회피하려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여성 최강자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이 여자바둑을 싹쓸이할까 겁이 나 그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3대 기전을 오픈하자는 요구도 패배가 두려워 피하고 있다. 한국 아마추어들이 일본 입단대회에 나가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이를 지하에서 굽어보고 있는 불꽃의 명인 슈사이의 심정은 어떠할까. 슈사이는 41세가 되어 명인이 되었고 50대의 나이에도 천재 소년 우칭위안(吳淸源)이나 청년 최강자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등과의 진검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이 같은 치열한 승부로 진기를 다 잃고 죽음을 맞게 되지만 그를 밑거름으로 하여 일본 바둑은 이후 40여 년간 크게 융성하는 것이다. 슈사이의 한 수 8시간의 장고는 시간제 바둑 이후 최장고 기록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슈사이(본명은 다무라 호주)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메이지유신으로 정부의 보조가 끊기자 바둑계는 혼란에 빠졌다. 당시 바둑 지망생들은 말똥줍기라는 직업조차 부러워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괴걸 슈호(19대 본인방) 밑에서 공부하던 슈사이도 숙생 생활의 비참함에 질려 슈호의 아들과 도장을 뛰쳐나온다. 밥벌이로 심인회합소(서로 찾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일)를 차렸으나 잘 될 턱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배를 곯았다.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가려고도 했으나 선교사의 사망으로 좌절한다. 도장에서 제명당한 그는 사찰 주지의 바둑 상대로 입에 풀칠을 했다. 다행히 이때 기경(棋經)을 열심히 공부한 것이 훗날 보약이 된다.

슈사이가 조선의 망명객 김옥균을 알게 된 것은 천행이었다. 김옥균은 20대 본인방 슈에이(秀榮)와 절친했다. 슈사이는 김옥균의 주선으로 본인방가에 들어가게 된다. <계속>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