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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치료 체계 정부가 만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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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얼마 전 보건복지가족부가 발표한 ‘응급의료기관 평가 결과’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사실상 응급진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 지정 응급실을 갖춘 전국 428개 의료기관 가운데 시설·장비·인력 면에서 법정 기준을 충족하는 곳은 겨우 53곳(12.4%)뿐이었다. 나머지 병원들은 전문적인 처치 능력이 부족한 그야말로 무늬만의 응급의료기관이었다. 이러니 갑자기 어디가 아프거나, 크게 다치면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 급기야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응급치료를 제대로 받지못해 사망한 외상 환자의 비율(예방가능 사망률)은 32.6%였다. 미국(5%)이나 일본(11%)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지만 기초 사회안전망인 응급진료 시스템은 후진국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처치의 적시성·전문성 등 일부 지표에서는 태국·몽골보다도 뒤떨어져 있다.

이런 낙후성의 가장 큰 원인은 정부가 응급의료 시스템을 민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급처치의 기본 요소는 전문 의료진과 비상 수송수단이다. 대부분 민간 의료기관들은 분야별 전문의들을 24시간 대기시키고, 필요할 경우 항공 수단을 활용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정부도 그런 점을 인식하고 2001년부터 응급의료기금을 조성해 병원들의 시스템 개선을 돕고 있지만 예산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 데다 다른 복지서비스에 밀려 해마다 축소되고 있다. 6월 말 현재 기금 잔고는 400여억원으로 응급진료소 하나 세우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응급치료 체계는 사회안전망에 앞서 헌법에 명시된 생명권 보호에 관한 일이다. 일자리를 만들어 복지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국민의 목숨이 걸린 기초 안전망을 방치해 두고 복지를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제 사회안전망 강화 차원에서 국가가 나서야 한다. 최소한 응급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비율을 경제수준에 걸맞은 수준으로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선진국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주요 거점마다 국가가 지원하는 외상센터를 갖춰 응급상황에 대처하고 있다. 적어도 5개 분야 이상의 전문의로 구성된 수술팀을 상주시켜 24시간 중환자를 돌본다. 해당 환자의 상태에 대해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스스로 판단되면 환자를 다른 전문병원으로 공수하는 응급항공 체계도 갖추고 있다.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자동차세 등 세금에서 일정 부분을 떼어 충당한다. 일본도 비슷한 응급치료 시스템을 가동 중이다. 최근 미국·일본·프랑스 등 선진국은 이른바 ‘생명 유지의 황금시간대’로 일컬어지는 사고 후 1시간 내에 환자이송에서 수술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효율적인 응급치료 시스템 구축은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이기도 하다. 2006년 교통사고 사망자 6300여 명 중 처치를 잘하면 살릴 수 있었던 경우가 2500명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에 따른 직·간접 피해는 7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미국은 고사하고 일본 수준으로만 예방가능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면 한 해 수조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민의 안전을 위한 공공서비스는 최우선순위를 두고 지원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다른 예산을 전용해서라도 강화해야 마땅하지, 투자 우선순위에 밀려 축소할 일이 아니다. 성장보다, 일자리 창출보다 국민 생명이 먼저라는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임봉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