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데스크의눈>괘씸죄와 生存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전장의 최일선에 총탄과 상혼(商魂)이 함께 날아간다.』 76년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용완(金容完)회장은 기업경영의 치열함을 이처럼 총탄에 비유했다.
81년 서슬이 시퍼렇던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전경련회장 사퇴압력을 거부하고 연임된 정주영(鄭周永)씨를 불러 『기업인들도이제 국가를 위해 헌신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이에 鄭회장은 『기업인들은 사업(이익)을 위해 사막을 휘젓고 다니다 목숨을 잃을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국익을 위해서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않습니다』라고 응답했다.
기업인들의 생리(生理)를 함축한 말이었다.새해들어 정부와 재계관계가 급변하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꽁꽁 얼어붙었던 이들 관계가 갑자기 봄눈 녹는 것처럼 바뀐 느낌이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상공회의소 신년하례회에 참석한데 이어내달쯤 열릴 예정인 중소기업계 하례식에도 전례없는 참석을 예고했다.31일에는 오랜만에 30대그룹회장들을 만난다.또 나웅배(羅雄培)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새 경제팀도 잇따라 재계와의 모임을갖고 있다.재계는 정부의 이같은 갑작스런 화해 제스처를 일단 반기면서도 내심으론 착잡한 심정인 것 같다.
한국재계를 대표하는 그룹회장들이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고 법정에 서는 모습이 여러차례 국내는 물론 지구촌에 생생히 전해지고있다.그런데도 정부는 『위축될 필요없이 적극적인 투자.경영에 임해달라』는 「대통령의 당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재계가 혼란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재계는 그래서 정부의 「당근과 채찍」사이의 진의와 배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업인이란 저수지의 물고기와 같아 돌을 던져도 놀라 도망가지만 먹이를 던져도 파문이 일면 일단 피하고 본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정치.경제권력 사이의 심한 불균형속에 파행적 관계가 계속되는한 정부가 「괘씸죄」를 적용하면 기업은 어떤 형태로든 「생존세」를 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재계에선 5공시절의 국제그룹해체 까지 거슬러올라가지 않더라도 6공때 현대건설이 홍콩 신공항 건설공사와 관련해 약 6천억원의 최저낙찰을 받고도 탈락한 사례가 쓰라린 경험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홍콩당국은 현대와 한국정부간 관계가 나쁜 이유를 들어 한국정부의 지급보증을 요구했으나 정부가 이를 끝내 거절,탈락한 것이다.정부가 국익을 저버린 사례다.
재계는 적어도 과거 정권하에서 최고 권력자에게 괘씸죄를 저지르면 살아남지 못했고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세를 지불했다고 생각하고 있다.일종의 보험료인 셈이다.문민정부라는 현정권하에서도 권력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한마디로 여러 그룹들이 혼이 났다고 재계는 믿고 있다.
5,6공처럼 돈보따리를 갖다 바치지는 않았지만 재계로서는 결과적으로 국내외적으로 불이익을 당했으니,이 또한 변형된 형태의생존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그렇다고 일부 기업인들이 이권과직접 관련해 뇌물성 자금을 바친 경우까지 면죄 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피부로 느낄 수 있는 행정규제완화와 자원배분의 강제권이 대폭 철폐되지 않고는 정부가 아무리 해빙을 외쳐도 공허한목소리에 그칠 뿐이다.그렇지 않고서는 「물러나는 당일까지 대통령은 대통령」이란 불안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예측가능하고 투명하며 일관성있는 정책만이 정부가 신뢰를 얻을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물론 재계도 잘못된 관행의 고리를 단호히 끊는 조치를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박병석 경제2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