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국 기자 이라크 억류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3면

영국 일간 더 타임스의 스티븐 패럴 기자는 지난 6일 전투가 치열한 이라크의 팔루자 부근에서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했다. 무장괴한에 잡혔다 풀려난 것이다. 패럴 기자는 8일자 신문에 자신의 억류기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스라엘 특파원인 나는 취재를 위해 요르단 국경을 거쳐 이라크로 들어왔다. 미국인 프리랜서 오를리 핼퍼린과 방탄 벤츠차를 빌려 사막으로 난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러다 바그다드를 32㎞ 앞둔 팔루자에서 그만 십자포화에 걸리고 말았다. 총알이 빗발치듯 했다. 나는 차를 지그재그로 몰며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타이어에 총알이 맞는 바람에 실패했다.

차가 멈추자 칼라슈니코프 소총과 유탄발사기로 무장한 복면 괴한 수십명이 순식간에 에워쌌다. 괴한들은 총과 사냥칼을 우리의 얼굴에 들이대면서 현금과 서류.휴대전화기.신분증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복면 괴한들은 "영국놈들, 미국놈들"이라며 서투른 영어로 욕을 해댔다. 그들은 우리 눈을 가린 뒤 어디론가 끌고 갔다.

우린 어두컴컴한 방에 처박혔다. 잠시 뒤 큰 키에 검은옷 차림의 한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이 나타났다. 아부 무자히드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대뜸 옷소매를 걷고 잘려나간 한쪽 팔을 흔들며 "미국인이 지난해에 이렇게 만들었다"며 눈에 불을 뿜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왈칵 엄습했다.

8시간에 걸친 신문이 시작됐다. "왜 왔나" "신분이 뭐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처음엔 버텼지만 결국 모두 밝힐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이다. 이라크를 취재하러 왔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무자히드는 '미군이냐, 기자냐'를 놓고 고심하는 듯했다. 생사가 엇갈리는 피말리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부시에게 묻기 위해 너를 살려주겠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원하는 게 뭐냐. 석유냐 민주주의냐. 왜 미군은 민간인들을 죽이나. 사람을 죽이는 게 민주주의냐."

한시름 놓는가 했더니 갑자기 내가 머리를 빡빡 깎았다는 게 문제가 됐다. 머리 스타일을 보니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인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기겁을 한 나는 "아니다. 나는 원래 대머리다"라고 겁먹은 소리를 질렀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되찾아온 소지품 속에서 7년 전 딴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이 나왔다. 거기 사진에도 내 머리숱은 아주 성겼다. 내가 "봐라. 난 예전부터 대머리였다. 군인이 아니다"라고 외치자 웃음이 터져나왔다. 우린 풀려났다. 마을의 한 청년은 "너무 위험하다"며 우릴 바그다드까지 차로 데려다 줬다. 이들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보통사람이었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